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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삼국지의 역사를
100분으로 보는 적벽

by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주인공만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공연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문이 담긴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서 걷다 보면 정동극장이 나온다. 그 지리적인 성격에 적합하게 정동극장은 한국의 전통을 살린 공연을 한다. 정동극장은 내게 엄청난 재능을 담은 곳으로 기억되는 극장이다. 작년에 봤던 <궁:장녹수전>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그곳을 <적벽>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방문했다. <궁 : 장녹수전>도 여전히 공연 중이었다.

C열 75번은 맨 뒷자리였다. 저번 공연은 중간쯤 자리였는데, 사실 맨 뒷자리가 더 괜찮았다.

 

공연에서 하는 판소리가 거의 옛말이고, 가사다 보니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어 무대 오른쪽 텔레비전 화면에 한글 자막이 있다. 그래서 무대 전체와 화면이 한 번에 보이는 뒷자리일수록 더 좋았다. 무대 왼편에는 영어 자막이 있어서 외국인 관람객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 중간에 한번 화면에 오류가 생기기도 했는데 빠른 대처로 공연에 지장 없이 관람할 수 있었다.

 

내 옆에는 어린아이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있어서, 아이가 공연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10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무릎에 누워버렸다. 아무리 재미있는 공연이더라도 아이보다는 부모님을 데려가시는 것을 추천한다. 옛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해하기 좀 힘들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삼국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재밌게 볼 수 있는 듯했다.

지루할 틈이 없던 <적벽>

공연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런 말은 정말 잘 안 하는데 진짜 한마디로 좋았다. 평소에 잡생각이 매우 많은 편이라 몇 분 이상을 오래 집중하기 힘들어하고, 생각이 자꾸만 다른 데로 향하는 편인데 <적벽> 공연은 완전히 집중해서 봤다. 정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없이 재미있게 관람했다.

 

<적벽>이지만, 유비, 관우, 장비 세 명이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 것부터 시작해서,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일화, 그리고 적벽대전과 적벽대전 이후의 이야기들을 모두 담고 있어서 이 공연 하나만 봐도 '삼국지'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소설 원작인 영화를 볼 때 가장 아쉬운 게, 왜 그 정도밖에 보여주지 못할까, 좀 더 중요한 내용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감독 취향의 내용만 보여주거나 화면상으로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적벽> 공연이 정말 굉장했던 건,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장면에 수많은 '들러리'들을 등장시켜서 무대 자체가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는 거였다.

판소리 + 춤 + 연극의 엄청난 조화

유비, 관우, 장비 세 명이 의를 맺을 때도 뒷편에는 수많은 무사들이 나와서 함께 춤을 추고, 공명에게 찾아갈 때도 그들이 무대를 뱅뱅 돌면서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했다.

 

연극이란 장르가, 단순히 말이나 음악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요소도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며 한시도 눈을 놓치지 못했다. 연극이 지루해질 틈도 없이 움직이고 노래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이 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긴장을 잡을 때와 놓칠 때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 100분의 공연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극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무대를 재정비하는 시간동안, 약간은 처지게 되기 마련인데, <적벽>은 공연의 마지막마다 그 대단함에 사람들이 박수를 엄청나게 쳤고, 그 박수소리가 다음공연의 시작까지 이어져서 전혀 분위기가 다운되지 않았다. 박수만 총 10분은 넘게 친 것 같은데 그 박수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코너, 군사점고

그들이 마냥 메아리처럼 주인공의 말을 따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개개인이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 건, 적벽대전 이후 '군사 점고' 때였다.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살아남은 군사를 하나씩 점검했는데, 단순히 들러리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씩 판소리를 하면서 개개인의 장기를 소개했다.

마치 수련회에 와서 자기소개하는 자리처럼, 무리로만 보였던 그들 개개인을 눈여겨볼 수 있는 코너였다. 기마병인 군사가 말을 다 팔아버렸다는 이야기, 다친 데 하나 없이 너무나 건장한 군사가 자기를 회 쳐 먹으라는 유머 등을 아주 적절하게 사용했다. 또, 전쟁에 나가서 부모와 자식을 그리워하는 판소리도 넣었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 아무리 조조의 군사들이지만 그들도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겠다고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적벽대전 이후 관객에게 웃음을 주기도 해서, 진지한 이야기들 사이에 쉬어갈 수 있었고,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감동까지 주었다. 메인 이야기도 훌륭했지만, 주인공만이 주인공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진짜 연극을 보여줄 수 있어서 더 기억에 남는 코너였다.

주요 인물 캐스팅과 싱크로율

왼쪽부터 장비, 가운데 유비, 오른쪽이 관우였다. 장비는 연극 내내 웅장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양다리를 완전히 벌리고 힘을 주고 씩씩거렸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것도 공연 내내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비는 생각보다 비중이 작았다. 사실 <삼국지> 소설 자체에서도 유비가 인품이 곧은 것 말고는 강조할 게 딱히 없어서 무엇을 내세울 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관우는 의가 뛰어난 면을 잘 보여주었다. 다 잡아놓은 조조를 고민 끝에 풀어주고, 공명에게 벌을 달게 받겠다고 하는 부분을 담백하게 잘 표현했다. 과묵한 성격과 흔들리지 않는 행동을 극 중에 잘 풀어낸 것 같다. 그러나 관우 팬으로서는 관우를 좀 더 돋보이게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다.

조금 놀랐던 건, 공명과 조자룡을 여성 인물로 캐스팅했다는 점이었다. 아트인사이트에서 처음 문화초대를 받았던 <비평가>가 원작 공연을 보고 봤으면 이런 느낌일까. 매우 카리스마 넘쳤고, 분명 성별이 바뀌었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

어쩌면 이번 <적벽>의 하이라이트는 조조의 캐스팅이 아닐까 싶을 만큼, 조조가 너무 얍쌉하고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연기를 잘했다. 그걸 몸짓으로도, 노래로도 표정으로도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이 온몸으로 비굴하게 굴고 있었는데, 그래서 <적벽>이 그렇게 큰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군사 점고 때, 자신의 군사들 중 거의 다 죽어가는 병든 군사를 삶아 먹자는 이야기나, 그래서 군사들에게 비난받는 모습, 관우에게 온갖 말을 해서 약하게 만들다가 자기를 풀어주고 나니 근엄한 척하는 모습 모두 너무나 조조를 잘 표현했다. 적벽대전 이후 그의 역할이 살아났기에, 그 이후의 극을 더 재밌게 본 것 같다.

배우들 한명 한명이 모여 하나의 공연이 완성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줬던 <적벽>, 삼국지는 나중에 위나라로 통일이 된다. 어떻게 보면 관우가 조조를 저때 풀어준 것이 결국 미래의 나라를 망치게 하는 길이었겠지만, 어쩌면 공명이 내리는 벌에 목이 잘리는 게 당연한 거였지만 사람은 꼭 이성적인 판단만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건 '주인공'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인생을 책으로, 연극으로 보여주어서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통틀어보면 주인공이란 말도 참 웃기다. 사람 한명 한명, 전쟁에서 죽어가는 군사 한명도 자신의 삶에서는 주인공이었는데 말이다.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봤을 때 흐름을 다스리는 사람 몇명은 있을지라도 세상은 그들에 의해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공연이었다.

 

내 기준,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관우와, 가장 얄미운 조조의 콜라보도 대단했고, 그 방대한 역사를 100분안에 지루하지 않고 알차게 담을 수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정말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보고 싶을 연극이었다.

적벽 - 2019 정동극장 기획공연 -

  1. 일자 : 2019.03.22 ~ 05.12
  2. 시간 : 수-토 8시, 일 3시, 월/화 쉼
  3. 장소 : 정동극장
  4. 티켓가격 : R석 50,000원 / S석 30,000원
  5. 주최/제작 : (재)정동극장
  6. 관람연령 : 8세 이상
  7. 공연시간 : 100분

박지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