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미학

[컬처]by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시간의 미학

'첫 사랑'


-김용택-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 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 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 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 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모든 것들은 낡아간다. 시랑도, 즐거운 순간도, 아름다운 풍경도, 아픔도, 절망도 모두 다.  이 무수한 것들 중에서 남는 것은 결국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 뿐이다. 여기에 굳이 더하자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나 기념품 같은 물건들 뿐이다. 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이겨버린다. 사랑, 설레임, 새로움, 감동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지고 건조해진다. 고통과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건조해진다. 심지어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곱씹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그저 기억의 한 단편으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신기한 능력을 하나 가지고 있다.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들은 시간에 따라 명확한 사실에서 몇 가지를 더하고, 또 몇 가지를 뺀다. 기억은 우리의 머릿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고, 그 명확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긍정적인 착각이 자리잡는다.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모든 기억을 미화시킨다. 좋은 기억은 더 환상적으로, 나쁜 기억은 덜 고통스럽게 변한다. 심지어 그 고통으로 얻은 결실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억들은 엄선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잠들게 된다.

 

그리고 이 추억의 잔재들은 우리의 일상 작은 부분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청소를 하다가, 이사를 하다가, 문득 옛 물건을 마주치게 될 때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추억으로 변해버린 미화된 기억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사진과 기록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추억에 빠지기 위해서, 훗날 즐겁게 이 날을 되새기기 위해서.

 

모든 것들은 시간에 의해 닳아간다. 사랑도, 즐거운 순간도 아름다운 풍경도, 아픔도, 절망도 모두 다. 하지만 그러면서 이들은 한껏 변한다. 시간에 의해 이 기억들은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팠던 일이라도 웃으며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힘, 좋았던 기억을 한층 더 아련하게 만드는 힘을 말이다. 이러한 힘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의 미학'이다.

 

한나라 에디터

2017.01.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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