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가 된 '국민 엄마'의 마지막 인사

[컬처]by 아시아경제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2004년 유방암 발병 온몸으로 전이...불평·불만 대신 진득한 연기자의 삶

마지막 1년도 '일일시호일' 등 촬영 "죽음은 특별한 일 아냐" 낙관적 자세

"특별하지 않아도 모두 의미 있는 존재" 방황·불안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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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도쿠에(키키 키린)는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에게 팥소를 만드는 비법을 전수한다. 찬물에 불린 팥을 두 차례 푹 삶은 뒤 뜸을 들인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센타로는 불평한다. "복잡하네요." "극진히 모셔야 하니까." "모신다고요? 손님 말인가요?" "아니, 팥들. " "팥들요?" "힘들게 와줬으니까. 밭에서 여기까지." 그녀는 뚜껑을 살짝 들어 잘 익은 팥을 확인한다. 떫은 물을 흘려보낸 뒤 설탕을 넣고 뚜껑만 닫아놓는다. 센타로는 바로 불을 붙이지 않자 의아해한다. "또 기다려요?" "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잖아. 당과 친해질 동안 기다려줘야지. 그러니까 맞선 같은 거야. 뒷일은 젊은 남녀에게 맡기면 돼." "언제까지 지켜보죠?" "글쎄, 두 시간 정도?" "두 시간이요? 두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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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키린은 그녀가 연기한 도쿠에와 많이 닮았다. 불평, 불만 없이 진득하게 인내하며 연기했다. 그래서 긴 호흡으로 만들고, 모든 스태프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영화를 사랑했다. 그녀는 영화 '내 어머니의 인생'으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나는 물감의 한 가지 색, 혹은 정원의 나무 한 그루가 되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포지션에 있을 때 가장 홀가분합니다"라고 했다. 말석에 있더라도 괴로움은 따르게 마련. 키키는 이마저도 순리라고 생각했다. "창조라는 단어의 '창(創)'이라는 글자에는 '상처'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창고의 '창'도 이 글자를 쓰죠. 이 말은 곧 새로이 뭔가를 만들려면, 일단 부순 뒤에 만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무언가에 상처를 내면서 그걸 다시 복원해 간달까요."


차창 밖을 푸근히 관조하던 할머니는 지난해 9월 영원히 잠들었다. 후회가 남지는 않았을 듯하다. 제26회 일본영화비평가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으며 밝힌 바람이 그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수상 소감을 듣고, 영화에 진지하게 임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짧게 잡아 1년, 1년 정도 더 살아남아 열심히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그녀는 '일일시호일'과 '에리카38'에서 주연하고 이듬해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은 그런 그녀가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다. 고정관념이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재미를 찾는 방법을 들려준다.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낙천적인 생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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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는 2004년 유방암이 발병한 뒤 전신으로 암이 전이돼 14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그녀는 암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방암 판정을 받고 연 기자회견에서 "각오를 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육십둘까지 살아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내가 없어도 다들 잘 살아가겠구나 싶거든요. 이제 울어줄 부모도 없으니 죽어도 되겠구나, 이제 잘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각오죠." 키키에게 죽음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삶에 늘 존재하는 순리였다. "전후(戰後) 풍요의 시대를 살면서 죽음을 몹시 거부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생사는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이란 게 이렇게 당연한 건데도 남은 사람의 마음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에요."


그녀에게도 작은 소망은 있었다. 잘 늙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할 때 위험해 보이는 장면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빠졌다. 비행기도 웬만하면 타지 않았다. 항상 먹거리에 신경을 쓰며 스스로를 가꿨다.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빌렸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빌린 몸 안에 이런 성격을 가진 내가 들어 있는 거죠. 젊은 시절부터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행세하고 살았네요. 이제 와서 몸한테 미안하다고 해봤자 늦은 것 같아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라고들 하는데 암하고 오래 살고 있자니 '언젠가' 죽는 게 아니라 '언제든' 죽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도 빌린 걸 다시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무척 홀가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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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에게 암은 몸의 고마움을 알게 해준 병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일깨워줬다. 영화를 향한 열정 또한 더 뜨거워졌을 거다. 그녀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에서 틀니를 빼고 촬영했다. 여배우로서 누드를 하는 것보다 부끄러운 거라는 동료 배우들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머리까지 치렁치렁하게 풀어헤쳐 연금과 도둑질에 의존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키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제안했다"고 했다. "난 이제 중늙은이라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됐습니다. 또 하나, 사람이 늙어서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하고 같이 살 일이 줄어서, 그런 모습을 볼 기회가 없잖아요? 극 중에서 귤을 먹는 장면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잇몸으로 훑은 거예요. 이가 없다는 건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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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는 말년을 딸 우치다 아야코와 함께 보냈다. 혼자 지내기가 편했으나 딸이나 사위, 손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길 바랐다. 계속 떨어져서 살면 그런 걸 잘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단다.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도 바라는 바일 거다. 진심 어린 말만큼 좋은 자양분도 없을 테니. 어쩌면 도쿠에처럼 왕벚나무가 되어 수많은 센타로를 응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지.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2019.07.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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