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치욕을 가려준 작은 나무 한 그루

[컬처]by 아시아경제

고규홍 '나무를 심은 사람들'


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월계수 못 구해 대왕참나무로 대체

손기정 일장기 박힌 가슴, 나뭇잎으로 가려

부상 나무 화분은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교정에 심어

치욕을 간직한 ‘월계관 기념수’ 그의 삶과 뜻 오롯이 새겨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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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만리동 2가에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서울시 기념물 5호)'가 있다. 손기정(1912~2002)이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1889~1945)에게 마라톤 우승을 기념해 선물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밀히 따지면 틀린 이야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주최한 독일의 통치자는 히틀러였다. 그는 손기정을 위해 따로 나무까지 준비하진 않았다. 나무 화분은 월계관을 받은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부상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들어온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는 북아메리카에서 자라는 대왕참나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았다. 지금은 가을에 붉은 빛으로 물드는 단풍이 아름다워 가로수로 많이 심어 키운다. 하지만 손기정이 화분에 이 나무를 들고 왔을 때 우리말 이름은 따로 없었을 만큼 생경했다.


원래 올림픽 우승자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씌우고 월계수 화분을 부상으로 수여했다. 당시 월계수를 구할 수 없었던 독일 베를린은 대체할 나무로 대왕참나무에 주목했다. 대왕참나무라면 월계관의 화려한 멋을 충분히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머리에 씌워진 월계관도, 부상으로 수여한 화분의 나무도 대왕참나무였다.


인문학자 고규홍이 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나뭇결에 담긴 사람살이를 탐색하는 책이다. 나무 심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무를 가꿨는지, 어떤 태도와 자세로 삶을 살았는지 파악한다. 나무에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사람살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들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사의 빈자리를 퍼즐 맞추듯 꿰맞추게 된다. 저자는 "나무는 필경 살아있는 사람의 역사"라고 썼다.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에서는 나라를 잃은 절망과 강인한 정신이 동시에 느껴진다. 손기정은 1936년 8월9일 베를린의 영웅이 됐다. 세계 신기록(2시간 29분 19초2)으로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상대에 오른 그는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 했던 절망과 치욕이 앞섰던 까닭이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오자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부상으로 받은 작은 화분의 나뭇잎으로 일장기가 박힌 가슴을 살며시 가렸다. 저자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무는 애끓는 통한을 보듬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조국이었고, 그로부터 1000년을 더 살아서 이 땅에 새로 탄생할 영웅을 기다리는 올림픽 신화의 상징이었다. 청년 손기정은 자신의 부끄러운 가슴에 걸린 일장기를 가려준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조국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1000년을 살아갈 나무에 조국 광복의 꿈과 새 영웅 탄생의 꿈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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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40일 동안 배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며 화분에 담긴 어린 나무를 정성껏 보살폈다. 아침이면 물을 주고 저녁이면 성의를 다해 온몸으로 바라봤다. 고국 땅을 밟은 달은 10월. 어린 나무를 찬바람 부는 낯선 노지에 옮겨 심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식물원으로 옮겨 키우자고 했다.


손기정의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친 김교신 선생은 이 주장에 반대했다. 자기가 직접 나무를 보살피고 봄바람이 불면 교정에 심겠다고 말했다. 결국 김교신 선생의 집에서 겨울을 무사히 넘긴 나무는 이듬해 봄 당시 서울 만리동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 심어졌다.


대왕참나무는 우리의 참나무처럼 도토리를 맺지만 나뭇잎이 크고 화려하다. 길쭉한 잎사귀 가장자리에는 여러 번 깊이 패어 들어간 독특한 결각이 있다. 각각의 꼭짓점에 날카로운 바늘이 돋는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핀오크(Pin-Oakㆍ바늘참나무)'라고도 부른다.


독특한 잎 모양은 양정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했다. 당시 나뭇잎을 책갈피로 쓰는 게 유행이었다. 대왕참나무 잎을 책갈피로 쓰는 건 영웅의 후예들만 누릴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학생들은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만 되면 저마다 잘 생긴 잎사귀를 줍느라 법석 떨었다. 일부 학생은 나뭇잎이 저절로 떨어지기도 전 나무 위로 신발을 던졌다. 잎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극성이 심해지자 학교 측은 나무에 신발 던지는 행위를 징계했다.


양정고등학교는 1988년 새 교사로 옮겨갔다. 옛터는 '손기정 체육공원'으로 재정비됐다. 치욕의 기억을 간직한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는 여느 나무보다 빠르고 늠름하게 자랐다. 키가 17m를 넘고 줄기 둘레는 2m 가까이 굵어졌다. 조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서 영광의 순간을 상징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지만 모두가 귀하게 보호한 이 나무도 죽을 위기를 맞이한 바 있다. 한때 잎이 시들해지면서 생육 상태가 매우 나빠졌다. 뿌리가 뻗어나간 부분의 땅을 섬세하게 관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나무는 빠르게 자라 뿌리를 멀리 뻗었으나 바로 옆에 사람들의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뿌리의 호흡과 물빠짐에 문제가 생겼다. 서둘러 취해진 조치로 건강은 회복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보호 대책이 요구된다. 이 나무에 손기정의 삶과 그의 뜻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은 한 그루의 나무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나무는 청년 영웅과 그의 뒤를 이어갈 새 영웅 신화를 꿈꾸는 이 나라 모든 젊은이들의 바람을 담아 도담도담 자랐다. 영웅의 혼으로 제 몸을 키운 손기정 나무를 바라보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다. 떠난 영웅이 남긴 나무를 바라보며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어떤 영웅 영화의 화두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2020.02.2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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