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소에게 1g도 양보하지 않는 방법

[라이프]by 베네핏

대형 할인점의 포장대 쪽에서는 구입한 물건의 포장재를 하나하나 벗겨내 버리는 어머님들의 뒷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집에 가져가면 다 쓰레기라며 야무지게도 작업을 하신다. 포장을 벗겨내는 또 하나의 이유. 준비해온 장바구니에 다 들어갈까 싶던 양의 물건들이, 포장을 벗으니 옹기종기 잘도 들어간다. 허망할 만큼 부피가 확 줄었다는 건 함정.


이런 풍경을 자아낸, 우리나라의 포장술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과자를 머금은 질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인형이나 완구, 비타민 등도 제 몸에 맞지 않는 큰 옷을 여러 겹 입고 있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생활폐기물 배출량 약 49,000톤 중 무려 32%가 포장 폐기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음식물 쓰레기는 또 어떤가. 1인 가구용 식재료를 사자니 비싸고, 결국 마트가 정해주는 양만큼의 음식물을 사놓고 나면 꾸역꾸역 먹어내다가 끝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줄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가장 쉽게 줄일 수 있는 것이 포장 쓰레기나 음식물 쓰레기일 것 같은데, 소비자에겐 선택지가 거의 없다. 그저 마트에 나온 걸 살 뿐이니 말이다. 그럼 파는 사람들이 포장을 아예 안 하면 되지 않는가. 이게 가능하냐고? 놀랍게도, 가능하다.

쓰레기와 가격 거품, 포장재와 함께 사라지다

지난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에 오리지널 언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라는 이름의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오리지널 언페어팍트는 프리사이클링(Pre-cycling)을 지향하는 가게로, ‘포장재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곳이다. 프리사이클링은 ‘미리 조금 수고함으로써 재활용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질소에게 1g도 양보하지 않는 방법

©Jendrik Schröder

그렇다면 어떤 수고를 미리 해야 하는 걸까? 복잡하진 않다. 제품을 담아 갈 용기를 가지고 와서 미리 무게를 재 놓는 수고다. 이는 장보기를 마친 뒤, 통 무게를 뺀 순수한 내용물의 무게로 가격을 계산하기 위한 절차다. 이제 본격적인 장 보기가 시작된다.

곡물, 과일, 음료, 파스타면, 샴푸와 치약까지. 여기서 판매하는 400여 종의 제품은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마트의 상품들과 다르지 않지만, 포장재가 없기 때문에 진열된 모습이 확실히 다르다. 모든 제품은 낱개 포장되는 대신, 디스펜서 형태의 커다란 통에 들어 있다. 통의 입구와 연결된 레버를 잡아당기면 내용물이 흘러나오는 구조다. 소비자들은 제품을 담아 갈 용기를 가지고 와서 사고 싶은 만큼 담아가면 된다. 용기를 가져오지 않았을 경우에는 매장에서 사거나 빌릴 수 있다.
질소에게 1g도 양보하지 않는 방법

©Jendrik Schröder, Katharina Massman

더 싸게, 깨끗하게, 자신있게

오리지널 언페어팍트는 ‘포장재’를 없애는 것이 가져올, 다양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현실로 만들었다.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으니 당연히 포장 쓰레기가 나오지 않고, 소비자는 모든 제품을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으니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한 폐기물을 최소화할 수 있다. 용량 때문에 장 보기가 애매한 1인 가구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 포장 비용이 들지 않으니 가격이 저렴해지는 건 덤이다. 실제로 가격대가 높은 편인 유기농 곡물도 평균보다 싼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오리지널 언페어팍트는 어떤 상품을 들여올지 꼼꼼하게 신경쓴다. 창업자들은 제품을 직접 먹거나 사용해본 뒤 품질이 우수한 것들을 골라 들여놓고, 유통 과정에서 낭비되는 가격 거품이나 탄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역의 업체가 공급하는 제품들을 주로 판매한다. 제품을 무작정 많이 들여놓지도 않는다. 믿을 만한 제품을 최대한 남지 않게 팔겠다는 거다.
질소에게 1g도 양보하지 않는 방법

©Katharina Massman

하나 더, 디스펜서 통 안의 식재료를 생각할 때 염려되는 것 중 하나가 위생 문제다. 공동창업자 밀레나 글림보브스키(Milena Glimbovski)는 '우리는 철저히 위생적'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매장의 컨셉을 개발할 때부터 위생이 큰 이슈였기 때문에 보건 분야의 권위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일을 추진해 왔다는 설명이다.

모든 변화는 소비자로부터 시작된다

실용적이고 예쁘기까지 한 이 슈퍼마켓은 왜 시작되었을까. 사라 울프(Sara Wolf)와 함께 이 슈퍼마켓을 공동 창업한 밀레나 글림보브스키(Milena Glimbovski)는 채식 전문 유통업계에서 일하던 중, 판매되는 식품의 포장용기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포장 쓰레기를 줄이고 제품을 합리적으로 판매할 방향을 찾다가 프리사이클링 슈퍼마켓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출해냈다.


이 아이디어는 베를린 중소기업 진흥원에서 열린 창업 경연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45,000유로라는 예상 금액을 크게 웃도는 115,000유로를 투자받았다. 순풍을 만난 ‘프리사이클링 슈퍼마켓’ 아이디어는 테드 뮌헨 2014에도 초청받아 소개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지금, 그 관심은 프리사이클링의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4년 9월을 기준으로 프리사이클링 슈퍼마켓은 전 세계에 다섯 지점 정도 운영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에도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연간 1,600만 톤에 달하는 독일의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목표인 오리지널 언페어팍트도 2, 3호점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프리사이클링 슈퍼마켓이 그들 사회의 일상에 자리잡게 될 날도 머지 않았다.

무리해서 사지 않고, 포장 뜯어 질소 가득 만나지 않고, 쓰레기 봉투값도 덜 내고. 이 모든 혜택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손, 발품 뿐이다. 자, 질문이다. 당신의 집 앞에 이런 슈퍼마켓이 생긴다면 이용할 것인가? 지금 당신의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소비자가 환영해야 누군가가 한국에서도 이런 슈퍼마켓을 열어낼테니까.

에디터 신소진
2015.11.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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