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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블록체인의 '블'만 말해도, 블랙리스트 취급

by조선비즈

블록체인(blockchain) 스타트업 김모(34) 대표는 지난 3월 3개 주요 은행의 지점 10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모두 법인계좌 발급을 거절당했다. "블록체인과 관련된 사업엔 계좌를 내주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김씨는 블록체인을 통한 생체인증, 전자문서 관리 소프트웨어 등 핀테크(fintech·금융 기술) 해외 사업을 새로 추진하고 있다. 해외 송금도 한 달 반 동안 지연되다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모두 민원을 넣은 끝에 가까스로 송금에 성공했다.

 

블록체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또 다른 스타트업의 정모(33) 대표도 마찬가지다. 한 시중 은행의 지점 5곳을 돌아다녔지만 역시 법인계좌 발급을 받지 못했다. 또 서울 강남의 오피스 빌딩 두 곳은 '가상 화폐·블록체인 업종은 기존 임차인 보호와 보안상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정 대표 회사의 입주를 거부했다. 불시에 수사기관이 압수수색이나 보안 점검으로 들이닥치면 건물 전체 분위기가 흉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블록체인을 4차 산업 혁명의 핵심 기술이라며 양성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블록체인 관련 기업들을 모두 잠재적 사기꾼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상 화폐 규제에 블록체인 손발 묶여 

 

블록체인의 '블'만 말해도, 블랙리스

한국 블록체인 산업이 정부의 규제에 묶여 표류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 거래소 법인 계좌 감시와 발급 중지 등을 골자로 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올 초 비트코인 개당 가격이 2600만원까지 치솟으며 가상 화폐 광풍(狂風)이 불자 정부가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금융위는 은행에 '가상 화폐 관련 법인의 거래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위법이 의심되면 거래를 종료하고 당국에 보고하라'는 지침과 함께 위반 시 엄중 조치하겠다고 지침을 내렸다. 이후 은행들은 가상 화폐는 물론 그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 사업에도 아예 손사래를 치며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올 2월 3개 시중 은행에서 법인계좌 발급을 거부당한 신모 대표는 금융위와 금감원에 항의 민원을 접수해 '법으로는 금지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은행의 판단'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신 대표는 이 회신을 들고 다시 은행을 찾아갔지만 "나중에 가상 화폐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은행 본점하고 지점이 책임져야 한다"는 답변만 들었다.가상 화폐 사업에 대한 은행들의 대응도 제각각이다. 두나무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가상 화폐 거래소 업비트는 올 2월부터 4개월째 신규 회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주거래은행인 IBK기업은행이 '가상 화폐 거래와 관련한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신규 회원들에게 계좌를 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實名制) 방침에 따라 2월부터 모든 회원들은 가상 화폐 거래소의 주거래은행으로부터 실명 계좌를 발급받아야만 화폐를 사고팔 수 있다. 업비트와 달리 빗썸과 코인원 등 다른 거래소들은 주거래은행인 NH농협·신한은행이 신규 회원 계좌를 내주고 있다.

 

◇美·中과 격차 벌어져

 

지난해 3700억원 규모였던 전 세계 블록체인 산업은 2022년 12조원으로 30배 이상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미래 먹거리를 위해 기술 개발과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블록체인은 가상 화폐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기술이다.

 

이 때문에 가상 화폐를 투기로만 봤던 미국 제도권 금융의 시각도 바뀌고 있다. 미국 대표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 3일 미국 월스트리트 은행 중 최초로 비트코인 파생 금융 상품 거래에 뛰어들었다. 뉴욕증권거래소도 가상 화폐 비트코인 거래를 위한 플랫폼(기반)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정부는 가상 화폐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관련 산업에 대한 규제와 지원을 동시에 하고 있다. 미국의 가상 화폐 규제 기관인 SEC(증권거래위원회) 제이 클레이튼 위원장은 지난달 “블록체인은 미래 금융 사업을 바꿀 놀라운 잠재력을 갖고 있다”며 “정부는 이런 기술이 사기로 점철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수단을 취하려는 것”이라고 규제 배경을 설명했다. 중국은 ‘13차 5개년(2016~2020년) 국가정보화규획’에 블록체인을 중점 육성 기술로 지정하고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중국인민은행은 블록체인 관련 세계 특허를 68건, 알리바바는 43건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가상 화폐 거래소과 블록체인 기업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규정이 없는 상태다. 가상 화폐 거래소는 업종 분류조차 없고, 블록체인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개발로 당국에 신고한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가상 화폐 관련 규제가 불투명한 한국을 피해 아예 일본에 블록체인 관련 자회사를 세웠다. 김진화 블록체인협회 이사는 “블록체인을 4차 산업 혁명의 미개척지라고 하면서 정부가 아직도 명확한 제도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블록체인(blockchain·분산 저장)

 

특정 데이터를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사용자 컴퓨터에 분산 저장해 사실상 해킹이 불가능한 시스템. 가상 화폐 거래 내역 등 데이터가 담긴 블록(block)을 잇따라 연결(chain)한 모음이란 뜻이다. 가상 화폐는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대가로 주어진다.

 

 

임경업 기자(up@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