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나만 힘든 게 아니네"…
궁상 男女, 청춘을 위로하다

by조선일보

안방극장 점령한 궁상 코드

 

"가난해 스펙 못 쌓는다" 대사 등 방송에서 팍팍한 세태 그려내

시청자들, 궁상맞은 캐릭터 보며 '나와 다를 것 없다'동질감 느껴

 

취업 준비생 박정호(26)씨는 일주일에 한 번 밤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단골 평양냉면집을 찾는다. 문 앞 작은 테이블이 그가 노리는 자리. 냉면 그릇 하나, 무절임 그릇 하나면 꽉 찰 이 테이블 옆엔 '50% 할인석'이라는 푯말이 달려 있다. 자리가 협소해 주인이 음식값을 절반만 받는 자리다. "낮에는 경쟁이 심해 실패할 때가 많다"는 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좋아하는 음식 먹고 싶어서 손님 없는 밤에만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궁상(窮狀). 어렵고 궁핍한 상태. 알뜰살뜰 짠 내 나는 '궁상 코드'가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TV는 코끝 찡해지는 '궁상 남녀'가 점령한 지 오래. 궁상을 하도 떨어 생긴 묘한 매력엔 '궁상미(美)'라는 애칭이 붙었다. 제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절함에 가난한 자취생, 지갑 얇은 직장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드라마는 궁상女, 예능은 궁상男

요즘 드라마 여주인공은 궁상을 떨어야 뜬다.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님' 대신 당차고 생활력 강한 '궁상녀'가 주인공을 꿰찼다. SBS '수상한 파트너'의 은봉희(남지현)는 사법고시 패스한 변호사인데도 궁상맞다. 사법연수원 졸업 후 불러주는 로펌이 없어 법률사무소를 차리지만, 벌어들이는 수임료가 없어 보증금 다 까먹고 길바닥에 나앉는다. 헝클어진 머리와 칙칙한 피부, 도수 높은 뿔테 안경을 낀 행색은 변호사보다 고시생에 더 가깝다. 하지만 배짱만큼은 두둑하다. 태권도장 아르바이트를 뛰면서도 "견디고 버티면 좋은 날 온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나만 힘든 게 아니네"… 궁상 男女

지금 TV는 '궁상남녀' 세상이다. 왼쪽부터 '미운우리새끼' 이상민, '쌈, 마이웨이' 김지원, '수상한 파트너' 남지현, '나 혼자 산다' 이시언. /KBS·SBS·MBC

KBS '쌈, 마이웨이'의 최애라(김지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아나운서를 포기하고 백화점 안내데스크에서 일한다. 운 좋게 올라간 아나운서 면접시험에선 타 지원자보다 스펙이 딸려 홀대받는다. "열정은 혈기가 아니라 스펙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면접관의 핀잔에 "남들 유학 가고, 해외봉사 갈 때 저는 돈을 벌었다"며 맞선다. 실제 대기업 면접장을 빼닮은 이 장면은 포털에서 클립(방송 하이라이트) 영상 조회 수 22만건을 기록했다.

 

예능은 '궁상남(男)' 천지다. 개그맨 윤정수(45)와 가수 이상민(44)은 사업 실패로 고액 채무에 허덕이는 '생계형 연예인'으로 인기를 끌었다. 빚 탕감이 목적이다 보니 '근검절약'이 몸에 뱄다. 윤정수는 2013년 파산 선고 후 공백기를 갖다가 지난해 한 종합편성채널의 가상 결혼 예능에서 '몰락한 가장(家長)의 고군분투기'를 그려내 재기에 성공했다. 이상민은 예능 시청률 1위(21.5%·닐슨코리아)인 SBS '미운우리새끼'에서 '궁상민'이란 캐릭터로 주가를 높였다.

궁상으로 대동단결

'궁상'은 현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떨고 싶어서 떠는 게 아니라 떨 수밖에 없어서 더 처절하다. 청년 실업자는 120만명, 청년 실업률은 11%를 웃돈다.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해도 월급은 빚을 갚는 데 대부분 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3월 기준 '가계 신용 잔액'(가계가 은행·보험·대부업체 등에서 받은 대출과 결제 전 카드 사용액까지 포함한 금액)은 1359조7000억원으로, 국민 한 사람당 2600만원의 빚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계와 싸우는 하루하루가 전쟁인 셈이다.

 

시청자는 안방극장 속 궁상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나 혼자 산다'(MBC)에 출연한 배우 이시언(35)은 "쇼핑은 '중고나라'에서 즐긴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취업 준비생 안자혜(28)씨는 "현실과 동떨어진 화려한 삶보단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궁상'을 볼 때 더 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궁상을 떨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쌈, 마이웨이'의 이나정 PD는 "사고 치고,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시청자는 자신의 팍팍한 처지를 TV 궁상 코드에 비추어보는 듯한 '거울 효과'로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박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