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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중간으로 산다는 것

by조선일보

나라 별로 다른 '중산층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 정하는 중산층의 기준과 대한민국에서 얘기하는 중산층은 너무 다르다.

 

경제 신문이나 뉴스를 보다보면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가 많다. 경제 소식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나 인물 소개 기사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이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쓴다. 많은 글과 주요 경제 지표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산층의 정체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중산층이라고 부르며 한국은 중산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리했다.

중산층? 중간계급?

신문 기사와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중산층'이라는 말은 학술적 개념은 아니다. 철학자, 사회사상가에 의해서 정의된 단어도 아니며, 이를 구분하기 위해 합의된 재산 규모나 공인된 기준 역시 없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중산층은 중산 계급의 다른 말로 재산의 소유 정도가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중간에 놓인 계급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영미권에서는 'middle class'라고 쓰며 한국에서 이를 중산층이라고 해석한다. 중산 계급이 아닌 이 단어가 보편화된 것은 분단 이후 반공 체제 아래에서 공산주의 색채를 띄는 계급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으로 산다는 것

중위소득 : 중위소득이란, 국민들을 소득 수준으로 나란히 세워서 그 중간 값에 해당하는 소득을 말한다. 즉 전 국민을 100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소득 규모 순으로 오십째인 사람의 소득. 2017년 기준 4인 가구의 중위 소득은 446만7380원으로 책정됐다. 중위 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가구를 중산층으로 본다. 키워드 더보기

주로 세계 여러 기구와 리서치 기관, 은행에서는 이 계층을 구분지을 때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OECD에서는 중위소득의 50~150% 집단을 중산층으로 본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2010년 미국 중산층 평균 소득을 6만 9487달러로 제시한 적 있으며 독일에서도 월 평균 3580유로 정도를 벌어야만 중산층이라고 보고 있다. 세계은행은 '글로벌 중산층은 세계적 생산품을 소비하고, 국제수준의 교육을 원하는 계층'이라고 정의한 적 있다. 숫자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경제력과 학력 등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경제 및 교육 수준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서 얘기하는 기준은 훨씬 자세하고 복잡하다. 나이와 교육수준, 인종을 결합한 중산층 구분 방식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소득이나 자산 규모는 계층 구분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너무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사회학과 경제학을 결합한 좀 더 복잡한 중산층 구분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는 많은 통계 조사에서 중산층의 범위를 잡거나 정책을 세울 때 OECD 중위소득 기준을 많이 적용하는 편이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 은행 "흑인은 대학 나와야 중산층"
중간으로 산다는 것

우리나라 중산층은 누구?

보건복지부가 통계청의 '가계 동향 조사'를 토대로 산정한 2017년 중위소득은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477만원 정도이다. 연간 소득으로 환산하면 5724만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월 223만원에서 670만원 정도를 버는 4인 가족이 OECD가 얘기하는 중산층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렇게 중산층으로 분류된 이들의 평균 생활상을 정리한 2년 전 자료가 있다. 2015년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서 당시 중위소득의 50%~ 150%에 해당하는 직장인을 상대로 조사해 중산층이라 불리는 이들의 평균 생활 모습을 통계로 냈다. 이들은 주로 본인 소유의 약102㎡(31평 정도) 아파트에 살며, 절반 이상인 62%가 중형급 이상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자녀 1인당 사교육비로 월 37.4만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응답자 절반 이상이 최근 3년 이상 해외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영화 관람 등 문화생활은 월 0.9회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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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서 나타나는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답한다. OECD에서 기준으로 제시하는 중위소득 폭이 넓기 때문에 중산층의 생활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은 현재 자신보다는 훨씬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대부분이 중산층의 기준으로 객관적 수치를 내세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상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매체에서 활용하고 있는 직장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에서도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부채가 없는 30평대 이상 아파트에 살고 2000cc 이상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는 월500만원 이상의 급여 생활자를 중산층이라고 본다고 응답했다. 또한 여기에 1억원 이상 예금 잔고와 연 1회 이상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월 180만원 버는데 중산층?… 비현실적인 정부 통계

그 기준, 어디서 난거요?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중산층 기준이 너무 소득과 숫자에 쏠려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과 자성이 잇따랐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이 함께 밝혀지면서 비교가 됐다. 중산층의 기준을 부의 규모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 사회 문화적 개념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중간으로 산다는 것

미국 중산층의 기준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줄 알 것,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등 네 가지다. 영국도 비슷하다.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이 제시한 '삶의 질' 공약 내용을 토대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를 제외하면 이 글에 나오는 기준은 모두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영국과 미국 대사관은 "처음 듣는 기준"이라며 "현재로서는 그 기준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고 전했다. 한국의 기준도 정확히 일치하는 조사 결과는 없다.

 

중간으로 산다는 것

그나마 출처가 명확한 프랑스 기준 역시 실제와 일부 다른데, 퐁피두 전 대통령이 제시했다고 알려진 기준에는 공분에 참여하는 것과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한다는 내용은 없고, 대신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립시킬 것 등 네 가지 기준이 추가된다.

 

이 글의 원출처는 2007년 한 노동단체 간부가 기고한 칼럼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간부는 "영국의 기준은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서 본 것을 옮긴 것이고, 프랑스는 다른 책에서 읽은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단순 비교도 어려운 주제를 다룬 이 글이 인기를 끄는 것은, 경제가 어려워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소수가 되면서 그만큼 중산층에 대한 관심이 커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특히 중산층이란 주제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SNS 달구는 '중산층 別曲'

하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 해외 중산층의 기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중산층을 가르는 주요 기준 중 하나는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자각이다. 다보스포럼에서는 자기 자신이 중산층 사회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신상태'가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주장한다. 이 자각을 바탕으로 계층의식을 가지고 교양과 시민 의식과 같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하면서 민주시민으로서 책임감을 갖는 사회통합의 핵심 계층으로 활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서양사회 중산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인, 서비스·사무직 등 신흥 부르주아들은 근대 시민 사회 발전을 이끈 핵심 계층이었다.

 

서양 선진국으로 가지 않고 우리와 같은 문화권으로 묶이는 중국, 일본과 비교할 때도 우리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이 경제적 요소에 치우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2년 매경이코노미가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의 국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한국인과 중국인은 중산층의 기본조건으로 소득, 주택, 금융자산을 꼽았고, 일본인은 소득에 이어 두 번째로 '일정 수준 이상의 상식과 시사지식'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자녀 세대 때 중산층의 기준으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국인은 500만원 이상 월평균 소득(16%), 일정 수준 이상의 금융자산(15%), 안정된 노후 보장(13%) 등 경제력과 관련된 조건들을 1~3위로 꼽았다. 하지만 중국인은 꾸준한 사회봉사와 기부(11%)를 2위로, 일본인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14%)과 일정 수준의 상식과 시사지식(14%)을 3위로 선택했다.

중간으로 산다는 것

지나치게 서양 사회 기준에 맞춰 우리 삶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려는 움직임도 자제해야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해지면서 중산층에 대한 기대도 경제적 측면만 강조되고 있는 현실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에게도 옛부터 전해오는 중산층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삶의 조건'이 있다. 조선 선비들의 청렴한 삶들은 지금은 잊혔지만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삶을 지향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각 나라 중산층의 기준과 함께 열거되는 '조선시대 중산층의 기준'은 사실 조선 중종 때 학자 김정국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 써 있는 구절이다. 김정국은 기묘사화로 삭탈관직을 당했다가 복관되어 전라감사와 병조참의, 공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어느 날 오로지 재산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한 친구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사람 사이의 의리를 지키면서 세상에 대한 도의를 지키고 사는 것이라고 썼다. 옛 선비의 작은 글귀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중산층 삶의 표본이 엿보인다.

 

구성=뉴스큐레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