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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화염 뚫고 10명 구조… 밀양 병원 5층엔 '할머니 천사' 있었다

by조선일보

"내 환자 구해야돼" 피난계단 20번 오르내린 67세 요양사 류연금씨

 

고령환자 이불로 싸고 대피시켜

딸·소방관 "위험하다" 말렸지만 "환자들 내 책임" 다시 병동으로

정작 본인은 유독가스 마셔 입원

화염 뚫고 10명 구조… 밀양 병원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는 38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구조활동을 한 이들 때문에 더 큰 참사를 피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요양보호사 류연금(여·67·사진)씨도 그중 한 명이다. 옥외 피난계단을 스무 번가량 오르내리며 환자들을 구출했다. 자신도 유독가스를 마셔 밀양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28일 만난 류씨는 "처음엔 무서웠다. 하지만 곧 '나 혼자 나가면 환자 맡긴 보호자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환자 보호'라는 요양보호사의 직업윤리가 위기 상황에서 무의식 중에 나온 것이다. 그는 "모든 환자를 구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고 했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류씨가 근무하던 5층 6개 병실엔 28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그중 8명이 사망했다.

 

5층엔 몸을 가누기 어려운 80세 이상 고령 환자가 많았다. 류씨는 환자들을 이불에 둘둘 말아 병원장·간호사 등과 옥외 피난계단으로 환자를 날랐다. 그는 "스무 번은 족히 왔다 갔다 한 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 정확히 모른다. 피난계단 쪽도 연기가 짙어 힘들었지만, 당장 불길은 없어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류씨의 도움으로 탈출한 김천주(85)씨는 "류씨가 담요를 덮어주고 수건으로 입을 막으라고 했다"며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생존자 김기택(91)씨의 아들(56)은 "대퇴부 골절로 입원한 아버지는 움직이기 어려웠다. 요양보호사 선생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며 "평소 자식 입장에서도 고마울 정도로 열심히 간병해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류씨는 화재 직후 딸(34)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사람 구해야 한다. 전화 끊어라"고 답했다. 딸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환자를 대피시킨 류씨는 또 환자를 구하겠다며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번엔 구조대원들이 "위험하다. 우리에게 맡겨라"라며 어깨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류씨는 뿌리쳤다. "우리(요양보호사)도 환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피시킨 사람은 10명이 넘었다. 오전 10시쯤 구조활동은 마무리됐다. 그제야 옆 건물 요양병원에 있던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은 요양병원 2층에 입원 중이었다. 한동안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남편이 무사히 구조돼 이송된 병원을 확인하고서야, 목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느껴 직접 병원을 찾았다. 구조 과정에서 유독가스를 많이 마신 것이다. 류씨는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자신이 구출한 환자들이 무사한지 지인들을 통해 연락을 돌렸다. 그는 "다행히 다른 병원에 이송됐고 무사하다고 한다"고 말하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밀양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던 류씨는 10여 년 전 요양보호사 친구의 권유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주로 노인 간병을 하며 환자들과 정(情)을 쌓았다. 류씨는 "'나도 나이들 텐데'라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밀양 화재 현장엔 류씨 외에 여러 의인들이 함께했다. 당시 세종병원 당직의사 민현식(59)씨도 환자들을 구출하다가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민씨와 간호사 등 숨진 병원 의료진 3명은 죽기 직전까지 환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피하라"고 외치며 병원을 뛰어다닌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 주변에 있는 시민들도 나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화재 초기 현장에 있었던 우영민(24)씨는 "나도 그렇고 주변에 있던 여러 시민들이 나서 수직 피난 미끄럼틀을 고정시키기 위해 잡아줬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밀양=안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