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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이혜운 기자의 살롱

9만8000원 정장으로
남자를 만들다

by조선일보

가난한 아버지도 아들에게 양복 한 벌 사줄 수 있도록…

중저가 양복 만드는 부림광덕 임용수 회장

서울대 떨어지니 아버지가 기대를 딱 끊더군요, 그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됐지요

9만8000원 정장으로 남자를 만들다

“저렴하고 질 좋은 양복으로 내수를 활성화하는 것,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저마다 꿈을 이루는 것. 내 사업가 인생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부림광덕 본사 1층 젠 매장에서 임용수 부림광덕 회장이 자신이 만든 양복들을 소개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누구나 좋은 양복을 입을 수 있도록 젠 가격은 9만8000원부터 시작한다. / 이진한 기자

"이봐, 해 봤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이 말은 1970년대 직장인들에게 성경처럼 받들어졌다. 특히 현대건설은 이명박 사장을 중심으로 중동 건설 붐을 일으키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2년 차 사원 임용수는 회사가 싫었다. 새벽 4시 반에 출근하고 휴일조차 제대로 못 쉬던 틀에 박힌 생활도, 종종 직원들을 때리기도 했던 군대 같은 문화도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사표를 냈다.

 

그때부터 임용수는 다양한 직함으로 불렸다. 경양식집 사장, 미국 백화점 메이시스 중역, 나이키 협력사 사장. 60세에는 국내 신사복 브랜드 창업자가 됐다.

 

남자들에게 정장은 단순한 옷을 넘어선다. 남자로 태어나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도, 퇴임식에 참석할 때도 정장을 입는다. 정장은 남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임용수(64) 부림광덕 회장은 왜 나이 60에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일까. 그리고 가격은 왜 9만8000원부터 시작할까. 이달 초 서울 서초구에 있는 부림광덕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무역, 의류 제조 등을 하는 회사로 2016년 기준 매출 478억원을 올렸다.

 

―남들은 은퇴 생각할 나이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50대 후반부터는 경영에 거의 참여를 안 했어요. 회장은 일을 안 할수록 미덕이라는 생각으로 지낼 때였죠. 그러다 어느 날 신문 기사를 봤어요. 한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들아, 양복 한 벌 못 사주고 가서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긴 거였죠. '한국 양복 값이 많이 비싸구나. 사회 초년생들도 양복은 필요할 텐데 내가 싸게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국내 양복 값이 유난히 비싼가요?


"한국처럼 양복이 비싼 나라가 없어요. 미국에선 100달러면 좋은 양복을 한 벌 사요. 일본 가도 15만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50만원, 80만원 이렇게 해요. 명품 양복만 가득하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게 없어요. 신사복 장사를 재벌들이 다 잡고 있어서 그렇더라고요. 신사복은 장치(裝置) 사업이에요. 라인 하나 까는 데 50억원이 들어가요. '내가 한번 해보자' 싶었어요. 양복은 직장인이면 사회 초년생부터 대통령까지 누구나 필요한 옷이잖아요. 제가 미국 '피어리스 클로딩'이라는 회사 외주를 담당할 때 도널드 트럼프 양복도 거래해 봤어요. 그땐 트럼프가 대통령 될지도 전혀 몰랐지요(웃음)."

9만8000원 정장으로 남자를 만들다

―9만8000원은 어떻게 책정됐나요?


"유부남이 와이프 허락 없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의 최대치가 10만원이라고 생각해요. 9만8000원짜리 양복은 재고 없이 전부 팔아도 적자예요. 그래서 비수기 때 공장을 돌려 옷을 쌓아 놓고 팔아요. 사람들이 9만8000원짜리 사러 와서 15만원짜리도 사가고 이러니깐 작년에 신사복 매출만 300억원 정도 나왔어요. 대략 계산하면 1년에 30만벌 넘게 판 거지요. 요즘엔 중국인들이 중국보다도 싸다며 그렇게 사러 와요. 브랜드 이름 '젠(ZEN)'도 제가 지었어요.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브랜드를 보니 단어가 짧더라고요. 폴로·나이키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젠틀맨을 생각해서 '겐트(gent)'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젠'이 더 심플하고 멋지더라고요."


―내수는 처음이죠?


"그전에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수출만 했죠. 그땐 외화를 벌어들이는 게 사업가의 미덕이었거든요. 이젠 내수 활성화가 중요한 시대죠. 더 늙기 전에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 시대 사람들은 평생을 바쳤던 꿈이 '애국(愛國)'이에요. 1980년대 미국에서 포니 차만 봐도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죠. 저가(低價) 양복이지만 최고의 제품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안에 특허가 잔뜩 들어 있어요. 전 한국 기업이면 어디나 특허를 공유할 준비가 돼 있어요. 일본 유니클로는 박애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회사예요. 아니면 그렇게 좋은 물건을 싸게 못 팔아요. 저에게도 박애 정신이 있어요. 젠을 통해 그걸 실행하고 싶어요."

9만8000원 정장으로 남자를 만들다

1980년대 미국 메이시스백화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임용수 회장. 당시 메이시스백화점 한국지사 직원이었던 임 회장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국 제품을 메이시스백화점에 납품하는 일을 조율했다. / 임용수 회장 제공

림스키로 불리던 키 160㎝의 한국인"

림스키(Limsky), 이번에는 와이셔츠 계약이에요."

 

1981년 서울 중구 조선호텔 로비. 미국 백화점 메이시스에서 온 바이어들이 앞다퉈 림스키를 찾았다. 그는 구매 목록이 적힌 서류를 받은 후 제일모직·선경·반도패션 등 국내 섬유 회사들을 돌며 계약을 대신 진행했다. 림스키라 불린 남자. 27세 임용수였다. 림스키는 메이시스 직원들이 한국 지사에 근무하던 임용수가 유대인처럼 빠릿빠릿하고 장사 수완이 좋다고 붙인 별명이다.

 

잘 다니던 현대건설을 나온 임용수는 경양식집을 차렸다가 일년 만에 쫄딱 망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할 무렵 고교 선배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미국 메이시스백화점에서 한국인 직원을 뽑는데 면접이나 한번 보라고. 그렇게 들어간 메이시스는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됐다.

 

―현대건설은 왜 나오셨나요.

 

"현대에서 통·번역을 담당했어요. 새벽 4시 반에 출근해 중동에서 온 텔렉스(전보)를 번역해 오전 6시 반 중동 회의 전까지 정 회장님이 보시게 하는 일이었어요. 회장님은 한자를 좋아하셨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한 후 옥편으로 한자를 찾아 보고서를 작성했죠. 그러고 나면 오전 6시 반쯤에 무교동 가서 해장국 먹고 현대건설 앞 여관에서 한숨 자고 9시쯤 들어가서 일을 마저 했죠. 그때부터는 그냥 '따까리'예요. '복사해와' 이러면 복사해오고, '이 서류 외무부 주고 와' 이러면 갖다주고."

 

―당시엔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았나요?

 

"제가 한국외대 영어과를 나왔어요. 서울고 출신이 외대 가는 건 말이 안 될 때였죠. '인생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구나' 느낀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외대 다니며 고등학교 때 못해본 잡기를 다 해봤어요. 당구 치고, 술 마시고, 여행 다니고. 당시 아버지가 대학교수라서 집안의 기대도 컸는데, 서울대 떨어지니 딱 끊으시더라고요. 기대받지 않는 삶이 자유롭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제가 속박받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는 것도."

 

―첫 사업인 경양식집 '하나야'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현대건설 그만두고 부모님께 결혼 자금 2000만원을 미리 받아 서울 충무로 스카라극장 길 건너편에서 시작한 사업이었죠. 당시엔 '숲속의 빈터' 같은 이름의 경양식집이 유행이었거든요. 인테리어 예쁘게 해서 장사하면 잘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도 안 돼 본전도 못 뽑고 다 날렸어요. 그때 얻은 교훈이 두 가지예요. 모르는 사업은 하지 마라.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발을 빼라. 당시 돈 들인 게 아까워 가게를 넘기니 마니 하다 손해가 더 컸지요."

 

―경양식집 접고 입사한 메이시스백화점에서는 오래 일하셨는데요.

 

"근무 조건이 좋았어요. 일단 토·일요일·국경일 다 쉬어요.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도 칼같이 지켜요. 월급도 현대건설보다 세 배 많았어요. 그리고 제가 일 잘한다고 입사 1년 반 만에 중역을 시켜줬어요. 걔들은 학벌을 안 보니깐."

 

―그때 림스키란 별명을 '얻으셨다고요.

 

"미국에서 바이어들이 오면 난 그들을 데리고 국내 섬유 회사들을 돌아다녔어요. 가이드 같은 역할이었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사람들이 물건값을 놓고 5센트를 올리니 내리니로 종일 네고(협상)를 해요. 암산도 잘 못해서 계산기 두드리는데 종일 걸려. 한국 기업들은 제품도 다 안 보여줘. 그렇게 기 싸움을 하는 거지. 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피곤해요. 근데 가만히 보니 미국 바이어들은 이미 한국에 올 때 목표 가격과 물량을 갖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안했죠. 나한테 대신 맡기고 여행이나 하고 있으라고. 그 서류를 갖고 내가 대신 한국 회사들을 만나서 계약을 진행했지. 그러니깐 이 사람들도 편하잖아요. 그러니 그들이 날 '림스키(-sky는 폴란드계 유대인 이름)'라고 부르더라고. 유대인들이 숫자와 협상에 강하거든요. 나 때문에 일본·홍콩 등으로 분산돼 있던 주문 물량이 한국에만 몰려서 다른 해외 지사들이 당황해했었지."

부자 임용수를 위한 '부림광덕'

임용수 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부자(富者)'가 되기 위해서였다. 사명(社名) 부림은 '부자 임용수'의 줄임말이다. 1980년대부터 한국 경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임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사업가다. 부림광덕의 양재동 사옥도 1998년 외환 위기(IMF) 때 벌어들인 외화로 지었다.

 

―그렇게 메이시스에서 잘나갔는데 왜 그만두고 창업을 했나요?

 

"13년 일했는데, 제가 미국 메이시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더라고요. 운동권들 말로 '미제의 주구' 같은 느낌. 한국 기업들도 제 덕에 돈을 번다지만 제가 직접 뭘 제조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잘나가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였어요. 믿고 결혼해준 와이프에게도 미안하고. 저보다 키가 8㎝나 큰 절세미녀거든요(웃음). 그래서 '월급쟁이로는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다. 부자가 되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경양식집을 차려보니 내가 안 해본 거면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수출 무역을 해야겠다. 그리고 (장점인) 영어 쓰는 걸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죠. 사업을 하려면 건강해야겠더라고요. 하루에 두 갑씩 피우던 담배부터 끊었어요."

 

―첫 사업 아이템은 스포츠 유니폼, 소위 팀복이었는데요.

 

"미국에서 뜨는 게 뭔지 보니깐 팀복인 거예요. 1990년대는 LA다저스, 시카고 불스 등이 한창 인기몰이를 할 때였거든요. 마이클 조던이라는 최고의 스타도 나왔고. 미국 팀복 업계 대표가 '스타터'라는 회사였어요. 무작정 거기 사장을 찾아가 제게 일을 맡겨 달라고 했지요. 1년 동안 먼저 써보고 결정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렇게 1년을 했고, 정식 체결 후에는 달러가 쏟아졌죠."

 

―위기는 없었나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미국 거래처들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살아는 있느냐고, 그리고 물건 제때 보낼 수 있느냐고. 제가 바이어들에게 '네 물건 싣기 전에는 난 죽을 수 없으니 걱정 마라'고 했죠. 상대는 웃었지만 전 진심이었어요. 1999년에는 주요 거래처인 스타터가 부도났어요. 공장에 쌓인 물건을 처리 못 하는 건 둘째고, 매출 절반 이상이 빠지게 된 거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무작정 옷 샘플들을 여행 가방에 넣어 직원 4명과 미국에 갔어요. 동부에서 서부까지 리복·아디다스·나이키를 돌며 영업했죠. 다행히 그곳 관계자들이 제 회사를 알았어요. 전에 메이시스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림스키'에 대한 신뢰가 이번에도 통해 세 회사 모두와 계약했어요. 그렇게 2~3년 지나자 나이키가 자기들하고만 거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러자고 했어요. 나이키는 당시 매출 1위였거든요. '장사는 1등하고 해야 한다'가 제 지론이에요."

 

―광덕을 인수하면서 제조업에 뛰어드셨죠?

 

"2002년 폴로·랄프로렌 오더를 생산하던 부산의 광덕물산 최 회장이 저를 찾아왔어요. 망하기 직전이라며 인수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공장을 인도네시아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인수했어요. 광덕 기술자들을 다 데리고 인도네시아에 단일 규모로 제일 큰 신사복 공장을 만들었죠. 직원 4000명이 연간 정장 150만벌을 만드는 곳이에요. 처음엔 OEM만 하다 2014년 자체 상표를 만든 게 '젠'이죠."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2년 전에 롯데백화점과 '맨잇슈트(MANITSUIT)' 브랜드를 시작했어요. 좀 더 많은 사람이 싸고 좋은 제 양복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지요. 현재 롯데백화점 신사복 브랜드 중 판매량으로는 1위예요. 이 브랜드로 해외 진출을 하는 게 꿈이에요. 34년간 수출업에서 종사했지만 제 브랜드로 한 적은 없었거든요. 그리고 제 옷이 국내외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세상과 싸우는 데 필요한 전투복처럼."

 

[이혜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