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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friday

신문 만들다 시계家業 잇기…
"둘 다 정확함이 생명"

by조선일보

자스민 오데마

최고급 시계 '오데마 피게' 회장


스위스 대표 신문사 첫 女편집국장

143년 역사… 창업자의 4대손

집안 자산 1兆… 대중교통 애용


고급 시계의 메카인 스위스에서도 초고가 시계로 유명한 브랜드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의 그 '오데마'를 만난다는 건 오데마 피게 시계의 모든 것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신문 만들다 시계家業 잇기… "둘

143년 역사의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 오데마 피게를 이끄는 자스민 오데마 회장. 그녀는 인터뷰 중에 ‘우리의 뿌리’라는 말을 반복했다. 강단 있는 어조에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 오데마 피게

제네바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떨어진 작은 산악 마을 '르 브라쉬스'에 있는 오데마 피게 본사. 143년 역사의 오데마 피게를 대표하는 시계 수백여 점이 가득한 박물관을 거쳐 사방을 시계로 둘러싼 회의실에서 자스민 오데마(77) 회장을 만났다. 1875년 에드워드 오거스트 피게와 '오데마 피게'를 창업한 창업자 줄스 루이스 오데마의 직계 4대손이다.

 

이렇게 많은 오데마 피게 속에 둘러싸인 순간이 오다니! 아름다움에 이끌렸다가 가격표에 흠칫 놀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애써 웃음 지으며 유유히 매장을 빠져나왔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흔히들 오데마 피게를 세계 3대 시계 브랜드 중 하나로 꼽는다. 사고는 싶지만 누구나 살 수는 없다는 게 오데마 피게다. 설사 그 많은 돈이 있다 해도 다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초고도의 복잡한 시계를 만들어내느라 연간 4만 개밖에 생산하지 않는단다. 제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6개월에서 길게는 6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어릴 땐 오데마 피게 시계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지요(웃음). 첫 시계는 남들처럼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시계였어요." 운전기사 없이 대중교통도 자주 이용한다며 소박하게 웃는 그녀 집안의 순자산은 약 1조170억원(9억5000만달러)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도전' '기존에 없던 제품'을 추구하며 장인정신과 전위적인 혁신을 내세우는 브랜드의 수장(首長)답게 그녀는 회사 이야기에 앞서 신문사 기자로 제네바신문 첫 여성 편집국장을 지낸 경력을 술술 풀어냈다. '규칙을 깨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To break the rules, you must first master them)'는 회사의 슬로건으로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가업을 그냥 이어도 됐을 텐데 왜 기자가 됐는가.

 

"어릴 적부터 내가 오데마 피게의 일원이 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부품들이 내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커가면서 시계 너머를 바라보고 싶었다. 세상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 최적의 직업이 기자 같았다."

 

―수십 년 전이라면 여성이 신문 기자를 하는 게 흔치 않았다.

 

"기본적으로 시계 산업과 언론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한다. 열정, 정확함, 철저함, 신뢰, 규율이 필요하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신문사의 첫 여성 편집국장이 됐다. 12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어려움은 없었나.

 

"특별히는 없었다. 최고의 신문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그렇게 이뤄 나갔다. 몇몇은 나를 안 좋아했을 수 있지만, 그건 그들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웃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회사를 떠나야 했을 텐데, 다행히도 12년간 그런 이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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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오데마 피게를 창업한 줄스 루이스 오데마(왼쪽)와 에드워드 오거스트 피게

―신문사에 있는 24년간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팀워크의 중요성! 처음에 기자 생활을 하면서, 기자들은 '나 홀로'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주로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각자가 담당 분야를 밑바닥까지 훑어 이야깃거리를 발굴하지 않는가. 개성은 또 얼마나들 강한지(웃음)! 하지만 좋은 회사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건은 자부심과 팀워크라는 걸 절감했다."

 

―기자 경력이 시계 회사를 꾸려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기존에 지녔던 선입견을 깰 수 있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그들의 시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됐다. 또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가 단단해지듯 폭풍처럼 휘감아오는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자라나는 기술을 배우게 됐다. 저널리즘은 고군분투할수록 그 열매의 아름다움을 귀하게 맛볼 수 있게 해주지 않는가."

 

―왜 기자직을 관뒀나. 가업을 잇는 게 숙명이었나.

 

"아버지가 무남독녀인 나에게 '회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1년 가까이 버티며 고민했다. 사내에 뛰어난 경쟁자가 많기도 했고(웃음), 내가 봐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기자 생활에서 얻는 전투력을 믿었다."

 

―고급 시계 중 유일하게 창업자 가문이 대를 이어 명성을 유지하는 회사다.

 

"1920~30년대 대공황 때와 1970~80년 일본에서 등장한 저렴한 쿼츠 시계가 시계 시장 판도를 바꿔버린 일명 '쿼츠 파동'이란 위기가 있었다. 많은 회사가 파산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재정적으로 탄탄했고, 뿌리에 대한 강한 자부가 있었다. 그 결과, 지금껏 독립 회사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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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마 피게의 대표 제품인 ‘로열 오크 퍼페추얼 캘린더’. 윤년 표기를 비롯해 날짜·월·문페이즈(달의 형상을 다이얼에 구현한 것) 등을 오차 없이 정교하게 반영해 2100년 3월까지 조정할 필요가 없다.

―다들 무너져 가는데 어떻게 재정 건전성을 유지했는가.

 

"전통과 혁신 그 외의 것에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외형을 부풀리기 위해 쓸데없이 건물을 짓거나 호사를 부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산속에서 산골짜기에 둘러싸여 사는 '산(山)사람'이다. 산에서는 한발짝 한발짝 차근차근 내디뎌야 정상을 밟는다. 빨리 뛰어오르다 보면 어느새 지쳐버린다."

 

―오데마란 이름의 중압감은 없는가.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세계 곳곳에 들어선 오데마 피게 매장을 보면 왠지 으쓱한 기분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하지만 난 어렵고 힘든 일은 신통하게도 금방 잊어버린다. 이 회사를 소유했다기보다는 종업원과 이 계곡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후손들이 장인정신을 이해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는 중간 매개체인 셈이다. 그들을 위해 난 지금도 일하고 있다. 자선단체인 오데마 피게 재단 활동 중 가장 좋아하는 프로젝트도 '숲 살리기'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지켜내야 한다."

 

―이 회사 일원으로 즐거웠던 순간은.

 

"아버지가 당신 시계를 물려줬던 날. 신문 기자로 열심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여러 말씀 대신 당신의 시계를 내어주셨다. 영광스러운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쯤 이곳에 오픈할 시계 박물관도 기대된다. 공모를 거쳐 구글 신사옥을 설계한 덴마크 유명 건축가 BIG(Bjarke Ingels Group)가 선정돼 건설하고 있다. 시계 산업의 역사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다. 아버지에게 처음 시계를 물려받았을 때의 그 설렘 같은."

자스민 오데마 프로필

  1. 1941 스위스 로잔 출생
  2. 1958 제네바대 경제학과 입학
  3. 1968~1980 제네바신문(Journal de Genève) 기자
  4. 1980~1992 제네바신문(Journal de Genève) 편집국장
  5. 1987 오데마 피게 이사회 멤버
  6. 1992~ 오데마 피게 회장
  7. 1996~ 오데마 피게재단 회장

[르 브라쉬스(스위스)=최보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