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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군대 대신 배 탄 청년들… 그곳은 바다 위의 지옥이었나

by조선일보

25세 청년 목숨 앗아간 승선근무예비역 제도

선박서 36개월 대체복무

해운사 소속, 외부와 단절… 중도 포기 땐 현역 재입대

약점 악용해 괴롭힘 심해

물도 안주고 수시로 구타 40~50도 기관실 감금도…

군대 대신 배 탄 청년들… 그곳은 바

일러스트=이철원

"배 위에선 몇 달을 내리 맞아도 맞았다고 호소할 곳이 없어요. '배에서 내리려면 선원을 그만두든가, 시체로 나와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군 복무 대신 배의 승무원으로 일하는 대체복무제도인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배를 탔다가 1년 만에 중도 포기했다는 A(24)씨는 "특히 원양 항해를 하는 배는 '떠 다니는 감옥'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부산의 한 해운사 소속 화학물질운반선에 올랐다. 하지만 첫날부터 선배 선원들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업무 적응 명목으로 3일간 잠을 재우지 않는 '줄당직'을 시킨 게 시작이었다. A씨는 "말대답하면 건방지다고 맞고, 대답 안 하면 무시한다고 맞는 식으로 거의 매일 구타를 당했다"며 "그렇게 때려놓고 밖에다 얘기할까 봐 매일 카카오톡 검사도 하더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배에서 내려 군 입대를 택했다.


3년간 승선근무예비역을 마친 B(24)씨는 "근무를 하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발목 인대를 크게 다쳤는데도 두 달 넘게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고 계속 일을 시켰다"며 "결국 한 번 더 넘어져 발목이 부러지니까 그때야 보내주더라"고 했다. 그는 치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복합통증증후군 판정을 받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 중이던 구민회(25)씨가 선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인권과 근로 감독의 사각지대에 있는 승선근무예비역 제도를 손보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떠다니는 감옥 생활… 물 안 주고 감금 체벌 

승선근무예비역 제도는 항해사나 기관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 해운·수산업체에서 3년간 승선 근무를 하면 현역 복무를 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대체복무 제도다. 대개 선원이 되려는 청년들이 지원한다. 1년에 1000명을 선발하는데 800~900명가량은 원양 항해를 하는 배에서 근무한다. 원양 항해를 하는 배의 선원들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육지에 상륙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하는 청년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려도 이를 막기 어려워 군대보다 더 문제가 심각하단 지적이 나온다. 


구씨의 사망 사건은 이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씨는 목포해양대를 졸업하고 작년 11월 부산의 한 해운사 소속 화학약품운반선에서 3등 기관사로 승선근무예비역을 시작했다. 그는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임이 괴롭힌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구씨의 유족에 따르면 그 선임 선원은 구씨에게 폭언을 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고 의무 휴식 시간을 뺏는 것은 물론, A4 20장 분량의 선상 매뉴얼을 별 이유 없이 손으로 베껴 적게 하거나, 문을 잠그지 못하게 하고 수시로 방에 들어와 괴롭혔다. 실수를 하면 내부 온도가 40~50도에 이르는 기관실에 감금하고, 물도 못 마시게 하는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구씨는 주변에 "목매달고 죽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보다"라는 등 고통을 호소하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수십건씩 보냈다. 지난 2월 회사에 이런 괴롭힘을 호소했지만, 별 다른 대답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지난 3월 15일 사우디아라비아 부근의 해상에서 "괴롭힘이 더 심해졌다"는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보낸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승선근무예비역의 자살 사건은 구씨가 처음이 아니다. 확인된 자살 사건만 2건이 더 있고, 일부에서는 매년 1~2명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끊지만, 해운사에서 쉬쉬해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한다. 

괴롭힘 고발하면 취업에 불리할까 봐 쉬쉬

구씨뿐 아니라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일하며 각종 인권 침해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도 바깥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인맥·학맥으로 복잡하게 얽힌 해운업계의 특성 탓이다. 승선근무예비역은 기관사나 항해사 면허가 있어야 근무가 가능하다. 지원자 대부분이 해사고와 해양대를 나와 선원을 지망하는 이들이다. 전국에 해사고가 2개, 해양대가 2개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해운사 소속 배의 선장과 선원들 대부분이 승선근무예비역들과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어 자연스럽게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이 때문에 지속적인 괴롭힘을 고발해도 문제를 공개하는 대신 내부적으로 조용히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하는 이들의 처지를 악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현역 입대를 해야 한다.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했던 C(26)씨는 "36개월 복무가 끝났는데도 배에서 내려주지 않았다"며 "항의하니까 '지금 배에서 내리면 해고해 버리겠다'고 협박해서 4개월 더 배를 탔다"고 말했다. 구씨의 유족 대리인으로 나선 정소연 변호사는 "피해를 당하는 청년들은 예비역 근무가 끝난 후라도 문제를 제기했다가 업계에서 찍히면 아예 취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신고를 안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권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