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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friday

귀찮다, 현금

by조선일보

현금 사라지는 사회


몇 백원도 카드 결제… 현금 없는 사회로

한국, 현금 결제비중 17%… 20代 이상 절반이 "지갑에 현금 3만원 미만"

더치페이 할 때도 현금 대신 '송금 앱'… 카드만 받는 카페·편의점도 생겼대요


거의 매주 집 근처 이마트 서울 신도림점에 가는 배인선(33)씨는 얼마 전 쇼핑 카트 보관소에서 카트를 뽑으려다 뭔가 달라진 걸 느꼈다. 손잡이 부분 홈에 100원짜리 동전을 넣어야 잠금을 풀어 카트를 이용할 수 있는데 이날은 휙 잡아당겼더니 카트가 뽑혔다. 옆에 붙은 안내문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쇼핑 카트를 동전 없이 운영합니다.'

 

"휴대전화 케이스 안에 신용카드 하나 달랑 들고 다니다 보니 100원짜리가 없어서 낭패 본 적 여러 번이에요. 직원한테 사정해 직원용 마스터키로 카트 빼 쓴 적도 있고, 발 동동 구르다 바구니 집어 들고 낑낑거리며 장 본 적도 있고…." 현금 없이 다니는 게 일상인 배씨는 "반가운 변화"라며 웃었다.

귀찮다, 현금

일러스트= 안병현

이마트는 문을 연 지 25년 만인 지난 4월 초 각 지점에 '동전 없는 카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롯데마트 등 다른 대형 마트도 일부 지점에서 시행 중이다. 이마트 측은 "요즘 현금을 아예 안 가지고 다니는 손님이 많아 직원들이 카트를 빼주는 데 허비하는 시간이 늘어나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현금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이름하여 '캐시리스(cashless·현금 없는)' 사회. 카드가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현금 구경하기가 어려워졌다. 계산대에서 손님이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네면 점원이 1000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닢 세어 거슬러주는 모습은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현금이 왕이다(Cash is king)." 주로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논할 때 쓰이는 말이다. 다른 어떤 자산보다도 현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 그런데 '왕'의 지위가 심상치 않다. 지폐와 동전 모두 부피만 차지할 뿐 갖고 다니기 귀찮은 애물단지가 됐다. 아예 한국은행이 나서 '동전 없는 사회'를 추진하고 있을 정도다. 전통시장, 노점상 등도 카드 결제기를 들인다. 1000원짜리 한 장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현금이 사라지는 속도는 세계 최고다. 뉴욕타임스는 '이미 현금을 거의 없앤 나라'로 한국과 스웨덴을 언급했다.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현금 이용 비중은 17%로 독일(53.2%), 네덜란드(34.3%), 캐나다(23.1%) 등보다 낮았다. 이제 일상에서 현금은 왕이 아니라 허수아비가 됐다.

몇 백원도 카드가 편해 

얼마 전까지 일상적인 소액 결제는 현금으로 했다. 편의점이나 작은 수퍼마켓 등에서 현금이 주로 쓰였던 이유다. 이젠 그 마지노선도 무너졌다. 편의점 씨유(CU)는 2016년 카드 결제 비중이 현금 결제 비중을 넘어섰다. 10년 전 카드 결제 비중은 10%대에 불과했지만 작년엔 60%가 넘었다. friday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전국 성인 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평소 결제 수단으로 현금을 가장 많이 쓴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6.3%에 그쳤다. 직장인 김수민(29)씨는 "편의점에서 1000원 안 되는 물건은 '동전 없앤다'는 생각으로 동전으로 계산했는데 요즘엔 물가가 올라 1000원이 안 되는 물건이 거의 없어서 쓸 일이 없다"고 했다.

 

귀찮다, 현금

그래픽=김의균

자연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현금 액수도 확연히 줄었다. 지금 지갑 속에 있는 현금이 얼마나 있느냐는 물음에 ‘1만원 이상~3만원 미만’이 27.2%로 가장 많았다. ‘1만원 미만’ 12.1%, ‘전혀 없다’ 7.6%였다. 절반가량이 3만원 미만을 가지고 다닌다는 얘기다.


현금을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는 당신은 결코 예외 케이스가 아니다. 설문에서 응답자 중 62.3%가 ‘어제부터 현금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고 답했다. ‘안 쓴 지 1주일이 넘었다’고 답한 사람도 22.4%였다.


번화가 근처 자동 입출금기(ATM) 앞에 현금을 뽑으려는 사람들이 줄 선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식당이나 술집에서 더치페이 할 때 각자 현금을 모으는 풍경도 줄고 있다. 현금은 모임의 필수 준비물이었지만 최근 송금 앱이 여럿 나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한 명이 카드로 값을 치르면 나머지 사람들이 머릿수로 나눈 금액을 휴대전화로 몇초 만에 그 사람에게 계좌 이체한다. 큰돈뿐 아니라 몇 천원 적은 돈도 앱으로 실시간 송금한다. 송금 전용 앱 ‘토스’의 누적 송금액은 작년 말 10조원을 넘었다.


현금을 안 쓰니 지갑도 변한다. 두둑한 지갑은 부의 상징이었다. 요즘엔 “뭣 하러 그렇게 돈을 들고 다니느냐”는 핀잔이나 듣는다. 한때 뒷주머니에 두꺼운 지갑을 넣은 채로 생활하면 골반과 척추가 틀어진다는 연구가 나올 정도로 뒷주머니에 지갑 넣고 다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얇은 카드 지갑이나 휴대전화 케이스 겸용 지갑이 장지갑과 반지갑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휴대하기 편해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최근엔 여성들도 카드 지갑을 많이 찾는다.

현금은 품위 유지비? 흔적 없애기용?

일상에서 현금이 귀해지며 가게에서 현금을 쓰는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현금 결제는 그 자체로 ‘팁’이 된다. 카드를 군말 없이 받는 자영업자들도 카드 수수료 때문에 현금을 내심 더 선호하기 때문. 대학원생 이창원(26)씨는 평소 카드를 쓰지만 현금 2만원 이상을 지갑에 꼭 넣어 다닌다. “단골집에서 결제할 때만 써요. 단골이 아니어도 식당 종업원이나 택시기사가 친절하면 절로 현금을 내게 되고요. 돈 없는 제가 줄 수 있는 일종의 팁인 셈이죠.”


직장인 이정우(45)씨도 지갑에 현금 15만원쯤은 항상 채워놓는다. “일종의 품위 유지비”라고 했다. “가게에서 계산할 때 쓰진 않아요. 이제 중년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니 위신을 위해서라도 돈을 갖고 다녀야겠더라고요. 식당에서 팁을 주거나 부하 직원과 술 마신 뒤 택시비 하라며 쥐여줄 돈은 있어야죠.”

귀찮다, 현금

가게 입장에서도 현금 결제하는 손님이 오히려 특이한 손님이 됐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건가’ 하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서울 관악구에서 최근 술집을 시작한 정모(26)씨는 “현금을 낸 손님들은 다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매출 2300여만원 중 현금은 50여만원뿐이에요. 손님을 보니 딱 세 종류더라고요. 막 성인이 돼 아직 카드가 없는 1999년생, 외국인, 아니면 불륜 커플.” 구석에 앉아 진한 애정 행각을 벌이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40~50대 커플이 현금 결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정씨는 “매일 카드만 받다 보니 현금 뭉치가 아직 낯설다”고 했다. 정씨는 돈을 접어서 셀 줄 모르고, 서양인들 돈 세듯 반대쪽 손으로 한 장 한 장 옮기며 센다. 한때는 ‘한국인이 외국인을 보고 답답해하는 것’으로 꼽히던 장면이다.

캐시온리? 캐시리스!

“현금만 됩니다”는 말은 이제 한국인이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설문 결과 응답자 중 59%가 ‘현금 없어 곤란했던 적 있다’고 답했다. 곤란을 겪은 곳은 노점상(33.7%), 전통시장(32.5%), 자판기(21.6%) 등이었다.

 

‘캐시온리(cash only)’ 내걸고 현금만 받는 곳은 살아남기 어렵다. 한때 동대문의 옷가게나 강남 지하상가 등에선 한바탕 흥정을 마친 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분위기 싸해지며 흥정 이전의 가격으로 돌아가곤 했다. 요즘엔 ‘카드 결제됩니다’라고 붙은 종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카드를 받는 시장이나 노점이 늘고 있다. 푸드트럭들도 계좌번호를 붙여놓고 계좌 이체를 받기도 한다.

 

서울 중구 중부시장 노점 78곳 중 20곳에 신용카드 단말기가 있다. 노점에서 건어물을 파는 박선자(49)씨는 “요즘엔 카드 비중이 3분의 1 정도 된다”고 했다. “손님들이 묻지도 않고 바로 카드를 내밀어요. 전통시장에서도 당연히 카드를 긁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 같아요. 명절 때는 카드 안 받으면 장사가 안 돼요.” 중구청은 명동, 남대문시장 노점에서도 카드 결제를 곧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일본에는 최근 아예 현금을 안 받는 ‘캐시리스 스토어(cashless store)’가 등장했다. 국내에도 몇 곳이 시범 운영 중이다. 카드 결제나 간편 결제만 가능한 무인 편의점 등이다. 서울 중구 이마트24 조선호텔점 입구 안내판에는 ‘현금 불가’라고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귀찮다, 현금

지난달 ‘현금 없는 매장’이 된 스타벅스 서울 구로에이스점. 전국에서 가장 현금 결제율이 낮은 매장이었다. 이젠 현금은 안 받고 카드 등 다른 결제 수단만 쓸 수 있다./김상윤 기자

스타벅스도 지난달부터 판교H스퀘어점·삼성역점·구로에이스점 3곳에서 캐시리스 스토어를 시범 운영한다. 전 세계 스타벅스 중 미국 시애틀에 이어 두 번째. 매장 입구와 계산대 앞에는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라는 문구와 ‘현금이 아닌 다른 결제 수단을 써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해당 매장 직원은 “현금만 들고 온 손님은 근처 다른 매장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당황하는 손님도 종종 있다. 매장에 현금을 들고 왔다가 모바일 카드로 결제한 신동근(38)씨는 “앞으로 신용 불량자는 커피도 못 마시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전국 스타벅스 매장의 현금 결제 비중은 2010년 31%에서 지난해 7%로 줄었다.

 

이미 많은 식당과 카페가 ‘비자발적’ 캐시리스 스토어가 됐다. 서울 중구의 한 카페는 전체 매출 중 현금 결제액 비중이 4.4%밖에 안 된다. 동전을 일주일에 1만원어치 채워넣을까 말까다. 이 카페 박유희(24) 점장은 “오피스 빌딩 근처 카페들은 카드 비중이 높다”고 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되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다. 한 자판기 업체 대표는 “2년 전에 비해 매출이 반 토막 났다”며 “한 대학병원에 자판기 10여대가 들어가 있는데 월 매출액이 800만원에서 440만원 정도로 줄었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800원짜리 음료수도 카드로 사는데 굳이 자판기를 쓰겠어요.”

캐시리스, 소비 촉진vs경제 관념 모호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가 소비를 촉진한다”고 말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제활동이 편리해져 경제 활성화에 도움 되고, 화폐 발행 비용 등 사회적 비용도 줄어든다”며 “현금 사용을 줄이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세계적 추세”라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현금을 썼던 가장 큰 이유는 결제가 편하다는 점”이라며 “최근 카드 등 다른 결제 수단의 거래 비용이 줄며 현금의 장점이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반면 비현금 수단을 쓰다 보면 소비 규모를 체감하지 못해 경제 관념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결제가 간편해지는 만큼 소비 성향(소득 대비 소비 비율)이 늘고 충동 구매가 이뤄질 수 있다”며 “소득과 분수에 벗어나는 소비를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김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