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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좁은 미로같은 뒷골목인데…
맛집,카페 몰리는 이유

by조선일보

좁은 미로같은 뒷골목인데… 맛집,카페

양식당 '을지로 미팅룸'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있는 여성들. /이지은 기자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지도에선 분명 이 근처라고 나오는데….”

 

지난 18일 오래된 인쇄소가 늘어선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 인근 대로변. 골목으로 들어서니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2명이 스마트폰 화면에 지도를 띄우고 두리번거리며 목적지를 찾아가고 있었다. 한참 헤매이던 이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낡은 건물에 있는 양식당 ‘을지로ž미팅룸’. 오후 5시에 문을 여는데 4시 30분부터 일곱명 정도가 건물 입구에 줄을 섰다.

 

이곳에서 약 150m 거리에는 일식 전문점 ‘분카샤(文化社)’가 있다. 이 가게는 을지로 인쇄골목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마스타, ○○○인쇄 등 색바랜 간판들이 걸린 낡은 빌딩 2층에 있다.

 

건물 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아늑하고 화사하다. 대표 메뉴인 일본식 후르츠산도로 유명해진 이 카페에도 여성 손님들이 대여섯개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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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도심 제조업 메카였다가 산업이 후퇴하며 낡은 동네가 된 을지로. /이지은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는 도기·타일·조명 등 부자재 매장이 밀집된 제조업 메카였다. 도심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서울 시내에 몇 안되는 낙후된 곳으로 꼽히던 이곳에 2~3년 전부터 청년들이 차린 카페와 식당이 하나 둘씩 생기고 있다. 냉침 밀크티를 파는 ‘호텔수선화’, DJ를 섭외해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칵테일바 ‘감각의 제국’, 옛날 다방 느낌의 커피를 파는 ‘커피한약방’ 등이 유명하다. 을지로3가에서 10년여째 백반집을 운영 중인 A씨는 “이 골목에 노인들만 돌아다녔는데, 요즘엔 젊은 친구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동네에 활기가 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렴한 임대료, 편리한 교통, 이색적인 분위기

좁은 미로같은 뒷골목인데… 맛집,카페

을지로 일대에 자리잡은 카페, 레스토랑, 바. /조선DB

을지로 상권은 최근 대세로 자리잡은 가로수길, 경리단길, 경의선숲길 같은 서울의 골목 상권과는 차이가 있다. 골목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상권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한 블록이나 골목 전체가 카페 골목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기존의 인쇄·조명 가게도 그대로 영업 중이다. 이 골목 건물 3~5층에 어쩌다 빈 공간이 생기면 카페나 식당들이 채우는 식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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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작은물'(왼쪽), 카페 '커피사마리아'(위쪽), 카페 '호텔수선화' 입구. 을지로의 '힙'함을 살리기 위해 간판을 아주 작게 걸거나 아예 걸지 않았다. /이지은 기자

을지로 상권이 주목받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강점은 부담없는 임대료다. 건물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20~30평 건물 임대료가 월 120만~150만원 선이다. 보증금은 월세의 10배 정도, 권리금 없는 경우도 많다. 을지로에서 걸어서 10분 이내인 종각과 광화문의 지난해 말 기준 3.3㎡(1평)당 상가 임대료가 각각 19만4700원, 12만8700원인데다가 1억~2억원대 권리금을 내야하는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이 일대 건물 매매가는 3.3㎡당 5000만원 정도다. 비교적 차량 진입이 쉬운 빌딩은 3.3㎡당 6000만원 선이다. 마포구 연남동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이 3.3㎡당 1억원, 외진 골목에 있는 건물도 평당 5000만원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매매가격도 다소 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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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호텔수선화'의 내부. /이지은 기자

을지로의 또 다른 장점은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 지하철 2·3호선을 낀 지역이어서 전철 이용이 펴린하고 버스 노선도 풍부하다. 광화문 업무지구와 가까워 직장인 수요도 많다. 광화문 근처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47)씨는 “을지로에는 을지면옥과 양미옥이라는 ‘전국구 맛집’에서 밥을 먹고, 차 한잔하러 골목 카페를 들른다”고 말했다.

 

을지로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인쇄·조명가게 자체가 갖고 있는 ‘칙칙한 도심 뒷골목’ 풍경 자체도 경쟁력으로 꼽힌다. 1층 상가가 아닌 3~5층에 있지만 동네 특유의 빈티지한 멋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간판을 달지 않거나 손바닥만한 크기로 팻말만을 걸어둔 가게가 대부분이다. 카페와 식당들이 한 곳에 몰려있지 않고 흩어져 있어 지도를 보고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20~30대들은 “을지로 맛집은 골목길을 헤매면서 찾아가는 맛이 있다”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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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상권과 관련된 검색어들의 검색 빈도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네이버 데이터랩

대형 상권과는 달라…세운상가 개발과 연계할 수도 

을지로 상권은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 전문가들은 현재 을지로 상권이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처럼 골목이나 블록 전체가 카페 상권으로 바뀌기 보다 오래된 인쇄·조명 업체들 사이에 숨어 있는 ‘소소한 볼거리’가 있는 상권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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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인쇄, 조명집 등 가게들은 단골이나 협력업체를 잃지 않기 위해 을지로를 떠나지 않는다. /이지은 기자

을지로 일대 건물에는 빈자리가 잘 나지 않아 카페와 식당이 무더기로 유입되기는 어렵다. 을지로3가의 B인쇄소 대표는 “여기서 인쇄, 부품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몇 십년씩 자리를 지켜온 터여서 단골이나 협력업체가 많아 을지로를 쉽게 떠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을지로3가 태평양부동산의 지남식 대표도 “최근 2년 새 젊은 친구들이 카페, 식당을 차리고 싶다며 문의를 많이 하는데, 물건이 없어서 중개를 해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런 점이 을지로 상권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특정 지역을 모두 카페와 식당이 점령하면 임대료가 치솟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은 기존 인쇄 업체들이 내 준 빈틈에 조금씩 상가가 들어가는 형태인 만큼 임대료가 서서히 오르는 편이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연구원 이사는 “기존 인쇄업체와 새로 들어선 카페·식당이 적절한 임대료를 유지하며 공생하는 구조가 바람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을지로 상권이 도심 재생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세운상가와 연결해 을지로 상권의 예술적인 특성을 살리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