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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아무튼, 주말

마음에 들 때까지...
작명도 AS 시대

by조선일보

이름 바꾸기 쉬워진 세상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이름을 바꿀 수 있다. 제한적이지만 성(姓)도 가능하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사소한 이유로 바꾸는 일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금기였다. 그러나 2005년, 대법원은 '권리 보장 차원에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을 바꿨다.


이후 개명(改名)은 폭증했다. 2004년 4만1000여 건에 불과했던 개명 허가는 판결 다음 해인 2006년 9만8000여 건으로 2배 이상 늘었다. 2017년에는 약 13만6000명. 하루 평균 370명꼴이다. 법적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신분을 감출 우려가 있거나, 개명한 지 3년 미만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바꿀 수 있다. 최근 5년간 개명 허가율은 95% 안팎. 취업, 대인 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이름을 바꾸는 사람부터 "한 번만 들어도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이름으로 바꿨다"는 이도 있다.


작명소는 개명이 늘며 고객 유치에 힘을 쏟는다. 남다른 전략을 내세워 다른 곳과 차별성을 둔다. 모든 영세 사업장이 그렇듯, 밉상 고객도 있다. 예쁜 이름을 위해 성씨까지 바꾸고 싶다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AS 보장, 외국인은 50% 할인

'AS(애프터 서비스) 보장, 고객 변심에 의한 환불은 불가합니다. 외국인 고객은 50% DC 해 드립니다.'


가전제품 판매장, 옷 가게 광고 문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작명소·철학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인터넷 홍보는 당연지사. 철학관만의 독특한 콘셉트도 갖춰야 한다. 판촉 전략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경남 양산시의 '참좋은작명연구소'는 지난해 3월 홈페이지에 '맘에 안 들면, 들 때까지 AS 확실하게 보장해 드립니다'라는 공지 글을 올렸다. "친척, 지인과 겹친다" "예쁘지 않다"며 다른 이름을 원한다는 문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한자 속성, 발음 등을 고려해 몇 번이고 이름을 다시 지어준다. 30년째 작명해왔다는 한동제 연구소장은 "이름 AS를 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가 더러 있어 '해주니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로 글을 올린 것"이라고 했다.


인천의 한 철학관은 우리나라로 귀화하는 외국인에게는 작명료를 50% 할인해준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며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고자 하는 여성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개명 신청서 희망 사항란에 '다문화 가족 배우자 할인 개명 신청'이라고 쓰면 절반 비용인 10만원으로 한국 이름을 받을 수 있다.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외국 이름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 베트남 여성이 '티 로안'이라는 이름이었다면, 한글로 '지한'이라고 바꿔주는 식이다. 이 철학관 원장은 "귀화 외국인들이 소문을 듣고 일주일에 2~3명은 찾는다"고 했다.


작명소를 개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체계적인 강의도 있다. 경기 평택시 '옥수산장 철학관'에는 철학관 개업을 원하는 '예비 관장'들이 찾아간다. 2개월 동안 주 2회 개인 지도. 강봉희 관장은 수업에 앞서 "점쟁이가 아니라, 사업가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학 이론은 물론이요, 마케팅과 상담 기술 등이 철학관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작명소끼리 험담하고, 밉상 고객에게 몸살도

직장인 강청범(33)씨는 이름이 투박하고 발음이 어려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지난해 개명을 위해 철학관 두 곳을 찾았다. 한 작명소에 20만원을 주고 '岱(태산 대)'에 '延(뻗어나갈 연)'을 쓴 '강대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예의가 있어 안팎으로 성공하겠지만, 자존심이 세고 욱하는 성질이 있는 사주"라며 "이름에 토(土) 성분을 넣어 막힌 기를 풀어줘야 한다"는 해설이었다.


그러나 다른 철학관을 찾자 "지은 이름을 보면 작명가의 수준을 알 수 있다"며 "그쪽에 준 돈을 나에게 주면 더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헷갈린 강씨는 결국 개명을 보류했다.


작명가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전형적 손님 뺏어오기 수법"이라고 했다. 상도의(商道義)를 어겼다는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작명가 조모(64)씨는 "사주를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보통 그럴 때는 '내가 해석하기엔 다르다'며 고객에게 선택을 맡긴다"고 했다. 철학관을 힐난하는 작명가도 있었다. 부산의 한 작명가는 "애초 사주는 운명을 나타내는 것인데, 사주를 보고 이름을 짓는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아마 내가 말한 취지로 고객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 작명가는 최근 걸려온 전화에 골머리를 앓았다. 2년 전에 취업이 되지 않는다며 이름을 받아 간 청년이었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이름이라면서요. 저는 지금도 백수입니다. 사기죄로 고소할 테니 경찰서에서 보시죠." 작명가는 "결국 이름을 다시 지어주며 진정시켰다. '취업할 수 있다'며 응원하는 말을 덧붙였는데, 마술과 같은 것으로 믿었나 보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쁜 이름 위해 성씨도 바꾸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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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설계사 추지연(31·가명)씨는 최근 '추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신청서를 냈다. 그녀는 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객에게 단정하지 않은 인상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이 이름을 보고 속으로 비웃는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던 중 묘책을 떠올렸다. 성씨는 그대로 두고 이름에 평소 붙이고 싶던 김씨 성을 붙이는 방법이었다. 추씨는 "가명으로 쓸 수도 있지만, 개명을 통해 확실한 이름으로 인정받고 싶었다"며 "허가가 나면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명함도 다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 성씨 변경은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재혼 가정 자녀가 성이 달라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가 그중 하나다. 이 외에도 세상을 떠난 친부 대신 계부 성을 따른다든지, 부모를 일찍 여의어 다른 성씨로 살고 싶다는 이유도 허용됐다. 그러나 이제는 특별한 가정사 없이 성씨를 바꾸고 싶다는 이유로 작명소를 찾는 이도 느는 추세다.


개명의 법적 절차를 대행하는 서울 양천구 '개명 세상'에는 최근 성씨 변경에 대한 문의가 늘어났다고 한다. 주로 희성(稀姓)인 사람들이 상담을 받는다. "최근 개명을 많이 하는데, 성씨도 쉽게 바꿀 수 있느냐"는 내용이다. 김정곤 대표 법무사는 "법원이 지금까지는 '성씨 변경은 당사자의 가정과 사회생활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허용하지 않았다며 의뢰를 거절한다.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추세를 볼 때, 개명처럼 법원 판단이 달라지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성씨 때문에 놀림당하는 자녀의 성을 바꿔주겠다는 이들도 있다. 피모(48)씨는 어릴 적 성씨 때문에 '피칠갑' 등으로 놀림받았다. 그런데 아들도 학교에서 그대로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다고 한다. 피씨는 "주위에서는 '어른이 되면 다 추억이다'라며 유난 떤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상처로 남아 있다. 아들의 아픔을 가장 잘 안다"며 아내의 '유씨'로 아들 성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 의뢰를 받은 변호사는 "2013년 비슷한 이유로 법원에서 변경 허가를 받은 사례가 있다"며 조만간 심판 청구서를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루에 370명이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취재하며 만난 작명가는 모두 "이름이나 성을 바꾸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진다고 낙관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강봉희 옥수산장 철학관장은 "개명을 위해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지를 바꾸는 것일 뿐 그 이상은 당신 몫'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한동제 참좋은이름연구소장은 "이름은 계속 불려야 힘을 얻을 수 있다. 취업, 인사고과 등 단기적 목표만을 바라보고 이름을 바꾸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영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