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넣고, '한강의 기적'은 대폭 축소

[컬처]by 조선일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편 용역보고서 입수


문화체육부 산하 국립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주진오)이 2012년 개관 후 처음으로 상설전시실을 대규모로 개편하면서 '한강의 기적' 등 경제성장(산업화)은 대폭 줄이고 반(反)독재 민주화 투쟁과 남북 화해를 강화할 계획인 것으로 확인됐다. 박물관은 또 작년 남북 정상의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까지 상설전에 새로 포함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이 정권 교체 이후 공청회 등 여론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현 정부의 '역사 코드'에 맞춰 전시를 바꾼다는 비판이 나온다.


본지가 입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전시개편기획 용역보고서'와 박물관이 전시업체 선정을 위해 조달청 '나라장터'에 게시한 문건 등에 따르면, 박물관이 발주한 전시개편 용역을 수행한 곳은 사단법인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원장 강진갑 경기대 교수)이다. 연구원은 작년 8월부터 지난 2월까지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용역비는 8900만원이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이 보고서에 대해 "전시 기획안(案) 작성에 적극 활용하겠다"고 했다.

'성공의 역사로서의 대한민국' 비판

보고서는 기존 전시가 '성공의 역사로서의 대한민국 재현'을 내세우며 경제성장을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국가 중심의 성장 사관에서 국민 개인의 인권·인간 중심 사관으로 개편' '남북 화해와 공존의 관점에서 통일의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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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됐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복장과 장비. 이 코너는 앞으로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박물관 측은 산업화 등 경제성장은 대폭 축소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 비중을 강화하는 전시 개편을 추진 중이다. /김지호 기자

우선 해방 직후 정국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좌우합작 운동·남북 협상 중심으로 구성했다. 여운형 연설 보도 기사, 좌우합작위원회 해산 사진, 남북협상 기자회견 등을 전시 자료로 제시한다.

'여순사건' 추가, '산업화' 대폭 축소

보고서는 또 여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토벌대 사진을 전시에 포함하겠다고 했다. 제주 4·3사건처럼 '분단 정부 수립을 전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으로 '여순사건'을 정의했다.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따지기보다 피해를 부각시키겠다는 의도다. 박물관은 또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전사자 조찬형 중사 유품은 계속 전시할지 불투명하다"고 했다.


기존 상설전시관 제3전시실(1961년~1987년)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이란 주제 아래 산업화와 민주화를 양적 측면에서도 균형 있게 다뤘다. 경제개발 계획 수립, 파독 광부, 간호사 등 산업인력 해외 진출, 수출 지향 공업화, 자동차산업과 중화학공업 발전 등을 주종으로 하면서 삼선개헌과 유신 반대, 민청학련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을 전시했다.


보고서대로라면 산업화는 대폭 줄어든다. 1953년부터 1987년까지를 다룬 '독재와 민주, 그리고 산업화' 중 12가지 주제 중 하나로 다룰 뿐이다. 대신 5·16 쿠데타, 한일협정 반대와 유신체제 반대, 간첩 조작 사건, 12·12와 5·18, 6월항쟁 등 민주화 투쟁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운동권박물관'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전시

더 심각한 것은 '남북 교류와 정상회담' 항목 아래 작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사진까지 전시하겠다고 나선 점이다. 현 대통령과 정부가 '업적'으로 내세우는 남북 정상회담을 국립 현대사박물관이 앞장서서 홍보하겠다는 것이다.


개편을 총괄하는 이용석 전시운영과장은 "작년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은 최근 상황까지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상설전에 포함할 예정"이라고 했다. 전상인 서울대교수는 "북핵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1년 전 판문점 회담을 전시한다는 건 난센스다. 홍보 차원에서 청와대 사랑채라면 모를까, 국립 현대사박물관 전시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촛불 집회' '미투'도 추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지난 4월부터 5층 상설전시실을 폐쇄하고 연말 재개관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1876년 개항부터 최근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3, 4, 5층에 분산된 상설전시실을 5층 통사관(通史館)에 통합한다는 계획이다. 5층 전시실 개편에만 예산 40억원이 배정됐다. 이용석 과장은 "용역 보고서 제출 이후 전문가에게 자문해 수정 중이다. 이달 말이면 최종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박물관이 지난 4월 조달청 '나라장터'에 게시한 문건에는 전시 구성을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산업화'는 대폭 축소하고 '민주화' 투쟁을 부각하는 등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고서에 없던 '촛불집회'와 '미투'까지 포함했다. 허동현 경희대교수는 "현대사 박물관은 국민 통합에 기여해야 하는데 전시를 편향적으로 바꾸면서 공청회 한 번 열지 않고 추진하는 건 문제다. 정권 바뀔 때마다 코드에 맞춰 전시를 바꿀 생각인가"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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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립 현대사 박물관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성공의 역사'를 전시할 현대사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탄생했다. 광화문 옛 문화관광부 청사를 리모델링해 2012년 12월 26일 개관했다. 연간 100만명이 찾는다.


정치적 독립성은 개관 때부터 논란이 됐다. 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면서 정부 직속 기관이기 때문이다. 전임 김용직 관장은 정권 교체로 임기 도중하차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19.06.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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