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병원이 만든 '가짜' 버스정류장

[라이프]by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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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진 런던특파원

지난 2일 낮 12시 영국 동남부 에식스의 사우스엔드 대학병원 응급실 대기실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하지만 응급실 안쪽 구석에 마련된 작은 공간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70대로 보이는 한 여성 환자가 다소곳이 앉아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은 그가 앉아 있는 장소가 꼭 버스정류장처럼 꾸며져 있다는 점이었다. 버스정류장 표지판과 버스 운행 시간표도 있었다. 영락없는 동네 버스정류장이었다.


병원은 지난달 치매 환자 전용 공간으로 이 '가짜' 버스정류장을 만들었다. 치매 환자들이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 등으로 응급실을 찾았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갖도록 돕는 목적이라고 했다. 병원 관계자는 "치매 노인들은 낯선 환경에 노출되면 불안해할 뿐 아니라 더 많은 기억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는 "버스정류장은 평생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이어서 기억력 저하 예방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며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세계 각국이 초고령 사회를 향해 질주하면서, 노인 치매는 어느 나라에서나 주요한 사회 이슈로 부상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탄생한 영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영국 공중보건국에 따르면 2017년 75세 이상 사망자의 26%(8만7000명)가 치매 때문이었다. 암 사망자 22%(7만4000명)보다 더 많다. BBC는 "치매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건강 문제"라고 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에 해당하는 영국 국민의료보험(NHS)은 "올해 5월 65세 이상 노인 치매 환자 수가 45만3881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며 "2016년 이후 7% 늘었다"고 말했다. 영국 알츠하이머학회는 노인을 포함한 치매 환자가 2025년 100만명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1979년부터 11년간 총리를 지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도 치매를 앓다 지난 2013년 87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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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본지 기자가 찾아간 영국 사우스엔드 병원 응급실 한쪽엔 ‘가짜 버스정류장’이 설치돼 있었다. 병원은 환자 안정을 이유로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진은 로열프리병원의 모습. /로열프리병원 홈페이지

가짜 버스정류장 설치는 '회상 요법'이라고 불리는 의료 기법의 일환이다. 옛날 사진, 소유물, 추억의 음악 등을 이용해 환자가 더 이상 기억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이 요법이 실제 치매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현대 의학은 아직 확실한 치매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순 없는 일. 영국 병원 등이 가짜 버스정류장을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면 사회가 최대한 힘을 합쳐보자는 취지다. 비용도 NHS와 지역 버스 회사 등이 부담한다. 영국에서 회상 요법은 2014년 서퍽주(州)에 있는 한 치매 환자 돌봄센터에서 시작된 이후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 런던의 로열프리병원은 단 10명의 치매 환자를 위해 버스정류장을 설치하고, 벽면을 수십년 전 신문으로 장식했다. 버밍엄의 로버트 하비 요양원은 내부에 1950년대의 상점 거리를 연상케 하는 우체국과 정육점, 다방 등을 만들었다. 브래드퍼드에 있는 앵커밀 요양원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틀고 '로마의 휴일' 같은 오래된 영화를 상영해 치매 환자들의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요법을 실시하고 있다. 리즈베켓대학의 세라 스미스 박사는 BBC 인터뷰에서 "치매 환자들은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기억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기 때문에 추억의 단서를 제공해주면 기억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김아진 런던특파원]

2019.07.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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