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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건축 속 과학] 건축 고정관념 깬 '종이 건축'

통나무로 지었냐고요?…
모두 종이랍니다

by조선일보

콘크리트 80% 하중 견뎌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아 원통 기둥 만들면 '튼튼'

햇볕 쬐면 더 단단해져… 건물 평균수명 50년 달해

 

난민들의 보금자리 되다

르완다 내전·고베 지진 등 재난 현장에서 빛 발해

예산·시간·인력 부담 적고 단열·내구성 등은 우수

 

1986년 일본 도쿄 엑시스 디자인 갤러리. 핀란드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전시회를 준비하던 계약직 큐레이터 반 시게루(坂茂)는 고민에 빠졌다. 주최 측은 전시장을 나무로 꾸미길 원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끝나면 철거할 구조물에 비싼 나무를 쓰자니 예산이 부족했다.

 

대안을 찾던 반의 눈에 건축가들이 설계도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트레싱지(紙)가 돌돌 말려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종이를 이용해서 나무를 흉내 내면 어떨까.' 머리가 번득였다. 현대건축에서 소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종이 건축'의 아이디어가 싹튼 순간이었다.

통나무로 지었냐고요?… 모두 종이랍

반 시게루가 2013년 지진 피해로 무너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을 종이로 복원한 모습(위 사진). 주요 뼈대와 내부 의자가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아래는 종이로 만든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의 외관(아래 왼쪽)과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난민들이 실제 사용했던 종이 가옥의 모습(아래 오른쪽). / 프리츠커 재단

종이 기둥, 콘크리트 대비 80% 성능

건축의 제1 원칙은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오롯이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건축물이라고 할 수 없다. 건축가들은 끊임없이 역학(力學)과 소재를 연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종이는 애초에 건축 소재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쉽게 찢어지고 변형되며 화재와 습기에 취약해 건축 소재로는 최악의 조건이다.

 

반은 숨겨진 종이의 장점에 주목했다. 전시회가 끝난 뒤 휴지 심처럼 마분지가 말려 있는 형태의 종이관을 생산하는 공장을 방문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종이관은 재활용이 가능하고 가격이 저렴하며 길이와 크기, 두께를 쉽게 조절할 수 있었다. 가벼워서 운송비가 적게 들 뿐 아니라 무너져도 사람이 다치거나 주변에 피해를 입힐 위험이 적었다.

 

반은 종이관 활용법을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했다. 접착제로 쓴 아교는 처음에는 끈적끈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히 굳어 접착력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방수(防水)를 위해서는 파라핀을 바르면 가장 좋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장기간 햇볕을 쪼이면 자외선의 영향으로 종이를 구성하는 내부 섬유질 구조가 일부 변하면서 종이관 강도가 높아진다는 점도 예상 외의 소득이었다. 강력한 방사선을 물질에 쪼이면 내부에서 물리·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분자 구조가 변하고 단단해진다. 종이관도 장기간 햇볕에 노출되면 같은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구조역학적으로도 종이관은 이점이 있었다. 같은 재료라도 단면 모양에 따라 힘에 저항하는 능력이 달라진다. 위아래로 하중을 받는 경우에는 세로로 세운 원통형 기둥이 가장 강하다. 약한 종이라도 두루마리 휴지처럼 여러 겹으로 말아서 원통 기둥을 만들면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다. 원통형으로 겹겹이 쌓인 종이 기둥은 같은 면적의 콘크리트 기둥이 받치는 하중의 80%를 견딜 수 있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반은 독일의 유명 친환경 건축가이자 구조공학자인 프라이 오토와 함께 하나씩 종이 건축의 한계를 극복해나갔다.

貧者들의 피난처가 된 종이 건축

반은 1989년 일본 나고야 디자인 엑스포장에 대형 종이관을 뼈대로 한 정자(亭子)를 처음 선보였다. 6개월 뒤 철거된 종이관들은 설치 당시보다 더 튼튼해져 있었다. 자외선과 아교 덕분이었다. 모두가 반신반의하던 종이의 힘에 찬사를 보냈다.

 

반은 1994년 빈자(貧者)의 성자(聖子)가 됐다. 유엔 고등판무관은 르완다 내전에서 2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자 플라스틱 시트와 알루미늄 막대로 만든 임시 수용소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난민들은 알루미늄 막대를 빼내 팔기 시작했다.

 

이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반의 종이집이었다. 마치 통나무집 같다고 해서 '로그 하우스(log house)'로 불린 반의 종이집은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에서도 피난민들의 집이 됐다. 모래주머니를 채운 맥주 상자와 그 위에 종이관으로 쌓아 올린 집은 단열·내구성·방수·방진 등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반의 시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베에서 불과 160명의 자원봉사자가 단 5주 만에 종이관으로 교회를 쌓았고, 2013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으로 무너진 대성당도 종이로 다시 세웠다. 예산의 한계, 짧은 공기(工期), 시공 인력 부족 등 기존 건축에서 걸림돌이 되던 요인들은 종이 건축 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이 세운 종이 건축물들의 평균 수명은 50년. 첨단 공법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 못지않다.

 

'종이는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깬 반은 2014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프리츠커상을 수여하는 하얏트재단은 "세상에서 가장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집을 지어준 건축가"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박건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