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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세차권에 수억 뒷돈… ‘닦고 막고’ 아파트 주차장서 밤샘 전쟁

by동아일보

강남 대규모 단지 ‘진흙탕 세차싸움’

세차권에 수억 뒷돈… ‘닦고 막고’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출장 세차업체 직원이 입주민의 차량을 세차하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는 세차권 독점 계약을 맺은 업체와 다른 업체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지난달 29일 오후 10시 서울 서초구의 A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 기자가 주차장을 돌아다니자 주차장 구석에 세워져 있는 두 대의 차량이 움직이더니 접근했다. 이들은 출장 세차 브로커가 고용한 직원들로 새로운 세차업체가 주차장에서 세차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매일 밤 ‘보초’를 선다.


직원들은 기자를 새로운 세차업자로 착각했는지 앞뒤를 차로 막았다. 40대 여성 직원은 “(세차) 아르바이트생이냐. 누가 여길 보냈느냐, 당장 나가라”고 위협했다. 기자가 주차장에 들어선 지 10분도 안 돼 세차업체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는 ‘새로운 외부 세차업체가 나타났다’는 글과 사진이 공유됐다. 소문을 들은 기존 세차업자들이 ‘지금 당장 A아파트 단지로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서울 강남권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세차권을 둘러싸고 ‘세차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차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입주민 차량을 외부 세차업체가 세차를 해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새벽 보초에 폭행 벌이는 ‘세차 전쟁’

세차 브로커는 세차권을 아파트관리소나 입주민대표회의 등에서 낙찰받아 세차업체에 팔고 수수료를 챙기는 업자다. 세차업자는 월 4만∼10만 원을 받고 매주 1∼3회 밤부터 새벽 시간 동안 주차된 차량을 세차한다. 서울 서초구에만 세차업체 10여 곳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활동 중이다. 세차업자 C 씨는 “일부 세차권은 수천만∼수억 원의 뒷돈을 건네주는 방식으로 암암리에 거래된다. 강남구 고급 아파트에서는 10억 원이 넘는 금액으로 거래된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수천 가구 규모의 아파트에서는 1, 2개의 세차업체가 세차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이 때문에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는 기존 업체와 신규 업체 사이의 분쟁과 다툼이 계속 벌어진다. 세차권을 얻지 못한 세차업체는 수익을 낼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 이 때문에 아파트에 와서 홍보를 하거나 입주민의 요청으로 세차 활동을 하다가 기존 세차업자와 다툼이 벌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D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신규 세차업체 사장 김모 씨(40)가 한 입주민의 차량을 세차 중이었다. 그러자 기존 세차업체 직원이 김 씨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쌍방폭행 혐의로 두 사람을 조사 중이다. 지난달 9일에는 입주민이 지하주차장에 세차 홍보 현수막을 걸어둔 차의 현수막을 떼어냈다가 재물손괴죄로 입건됐다.

다툼 계속돼도 마땅한 제지 수단 없어

아파트관리사무소 측은 세차업체의 과도한 경쟁 때문에 독점 세차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D아파트 관리소장은 “세차업체 사이에 경쟁이 과열돼 혼란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에 세차업체를 제한했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주민은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D아파트 주민 E 씨(42)는 “여러 세차업체를 비교하고 선택할 권리를 빼앗긴 것 같다. 어떤 세차업체든 이용할 수 있어야 다툼이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독점 세차권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계속되는 분쟁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경찰은 세차업체가 아파트에서 분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막을 권한이 없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폭행같이 범죄 혐의점이 없으면 업체들을 주거침입죄로 체포할 권한이 없다”며 “세차업체가 주차장에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은 아파트 경비업체의 몫”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에도 A아파트에서 세차업체끼리 분쟁이 생겨 경찰이 출동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치구도 출장 세차업체의 분쟁을 나서서 손쓰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서초구 관계자는 “공동주택은 입주자대표회의 등 내부에서 관장하기 때문에 자치구가 강제력을 갖고 세차업체를 쫓아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