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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오감으로 세상 보는 아이들… 남다른 창의력에 ‘헉’소리 나죠”

by동아일보

맹학교서 미술수업하는 엄정순 화가

“오감으로 세상 보는 아이들… 남다른

[1]‘우리들의 눈’은 2009년부터 맹학교 학생들과 태국을 방문해 직접 코끼리를 만지고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코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엄정순 디렉터를 지난해 12월 20일 코끼리 프로젝트 전시장에서 만났다. [3]그는 “맹학교 학생들마다 시각장애 정도가 달라 저마다의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하얀 도화지에 까만 점 네 개를 찍었다. 미술수업 시간, 아이가 그린 건 포크였다.


“핵심을 찌르는 표현력에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당시 수업을 했던 화가 엄정순 ‘우리들의 눈’ 디렉터(58)가 한 말이다. 그 아이는 맹학교를 다니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과 미술작업을 하는 비영리단체로, 엄 디렉터가 설립했다. 이 단체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23년간 맹학교에서 미술수업을 열고 있다. 독일 유학파로 국내 대학 전임교수였던 그가 왜 이런 길을 택했을까? 지난해 12월 20일 맹학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에서 그를 만났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맹학교 미술수업

“사람들은 봉사활동으로 보지만 제겐 ‘콜라보’입니다. 화가랑 조각가가 함께 작업하듯, 다만 남다른 감각을 가진 아이들과 작업하는 겁니다.”


엄 디렉터가 처음 맹학교에 간 건 대학교수 시절이었다. 맹학교에 성당을 지어주고 싶다는 한 독지가의 부탁을 받고 성당 건축 프로젝트를 맡은 게 계기였다.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그때 만난 학교 아이들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본다’는 걸 주제로 작품활동을 해온 제게 맹학교 아이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996년 엄 디렉터가 교수를 그만두고 맹학교로 간 이유다.


당시 시각장애 학생들은 미술교육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었다. ‘안 보이는데 미술교육이 왜 필요하냐’는 편견의 벽이 높았다. 그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점 같았다”고 말했다. 학교를 꾸준히 설득한 끝에 엄 디렉터는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미술수업 참여를 허락받았다.

“오감으로 세상 보는 아이들… 남다른

커다란 코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인천혜광학교 학생이 만들었다. 작품명은 ‘인천코끼리’.

‘그나저나 안 보이는데 어떻게 미술을 하지, 색깔을 구별할 수 있을까.’ 기자의 머릿속에서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엄 디렉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술은 그리고 만들기에 앞서 생각하고 질문하는 훈련이거든요. 안 보여도 궁금한 게 있고 다른 감각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맹학교 학생이라고 미술을 못 할 이유가 없죠.”

시각장애 학생이 던진 세상에 없던 질문

실제 맹학교 학생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봤고 세상에 없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초등 4학년 학생이 자신과 친구들의 얼굴을 한참 만지더니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엔 사람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왜 누구는 예쁘다고 하고 누구는 밉다고 하나요?” 엄 디렉터는 이 질문이 너무 창의적이고 매력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수업에서는 교사와 제자 구분이 없다. 다만 학생들에게 자신이 느낀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조언해줄 뿐이다. 학생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을 만지고, 맛보고, 귀를 대는 등 오감으로 이해했다. 그는 유독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인천혜광맹학교에서 만난 한 학생을 꼽았다.


어느 여름, 인천 ‘차이나타운’에 견학을 다녀온 뒤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지하철역에서 차이나타운까지 가는 길에 계단이 많았고, 전맹인 이 아이는 그날을 ‘덥고 힘들었던 날’이었다며 몸으로 기억했다. 크레용만 만지작거리는 학생에게 ‘크레용이 네 다리라고 생각해 봐’라고 조언하자, 그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분홍, 빨강 등 형형색색의 크레용을 쓰며 전지 10장에 걸쳐 계단을 그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색감을 세상에 드러냈다.

“오감으로 세상 보는 아이들… 남다른

작품 ‘대전코끼리’는 대전맹학교 학생이 코끼리를 만진 순서대로 점토로 빚은 작품이다. 왼쪽부터 코끼리의 코, 머리, 몸통, 다리, 꼬리가 순서대로 펼쳐져 있다. 우리들의 눈 제공

‘우리들의 눈’은 맹학교 학생들에게 직접 코끼리를 만져보고 작품을 만들어보는 ‘코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맹학교 12곳 중 7곳에서 이 프로젝트를 마쳤다.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마다 개성이 살아 있었다. 엄 디렉터는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며 “그동안 이 아이들한테는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수업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도 미술수업 시간엔 적극적이었다. 미술로 진로를 정한 학생도 나왔다. 엄 디렉터는 이런 학생들의 입시 준비를 따로 도왔다. 2015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미대 입학생이 나왔다. 다들 안 된다고 여기던 사회의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23년간 경험이 사회적 자산으로 남길

엄 디렉터는 맹학교 학생들을 ‘샘물’에 비유했다.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들이 요즘 시대가 원하는 창의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 샘물’이 사회로 더 멀리 뻗어가야 한다고 했다. 맹학교 미술수업이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것은 물론이고 장애와 비장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벽을 허무는 과정을 통해 시각장애인과 사회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 교육, 예술 분야에 걸쳐 다양한 전문가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사회에 어떤 쓸모가 있을지 당장 알 순 없다.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시각장애 미술교사에게 미술을 배운다면 이들의 상상력은 어떻게 달라질까….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지만, 적어도 아이들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미술수업에 흥미를 느끼며, 장애를 차별로 여기지 않고, 무엇보다 생각의 크기가 달라질 것 같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