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공장서 노예생활… 남은건 다친 다리뿐”

[컬처]by 동아일보

근로정신대 아픈 역사 기록하기로

“日공장서 노예생활… 남은건 다친 다

90세인 김성주 씨가 11일 경기 안양시 자택에서 근로 정신대 피해를 떠올리며 힘들어하고 있다. 경기도 제공

“월급은커녕 식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소.”

11일 경기 안양시에 사는 김성주 씨(90·여)는 14세 때 일을 떠올리며 어제였던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김 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전남 순천 출신으로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1943년(당시 14세)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항공기 부품제조공장으로 갔다. 그곳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일본인 교사의 솔깃한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장과 기숙사를 오가는 노예 같은 삶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5년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남은 건 프레스에 한 마디가 잘린 왼손 검지와 지진이 났을 때 다쳐 절게 된 왼쪽 다리뿐이었다. 지금껏 일본과 한국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김 씨는 “일본에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고 싶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김순옥 씨(89·여)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북 고창에서 3남 5녀의 장녀였던 김 씨는 1942년 12세가 되던 해 광주(전라도)의 방직공장으로 사실상 ‘끌려갔다’. 당시 마을 이장 딸이 징집 대상이었지만 대신 보내졌다.


이후 약 3년간 방직공장에서 수시로 구타를 당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일이 고됐다. 화장실도 보내지 않아 일하는 도중 용변을 봐야 할 때도 있었다.


김 씨의 장남 김모 씨(62)는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하신다”며 “왼쪽 무릎관절을 두 번이나 수술하는 등 건강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말기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勞挺身隊)에 자신의 뜻과는 달리 편입돼 고된 노역과 비참한 환경에 처했다. 근로정신대는 태평양전쟁 막바지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가 여성 노동력 착취를 위해 동원한 조직이다. 조선에서는 1944년 8월 공식으로 생겼지만 그전부터 법적 근거 없이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들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혼동돼 쓰이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만세운동에 관심이 집중되고 현 정부 들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국민적 응원은 커졌다. 하지만 근로정신대 피해를 겪은 이들의 아픔은 사회적 조명을 덜 받고 있다.


경기도는 도내 거주하는 22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첫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이들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지원 방안을 비롯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자는 취지다.


도는 이를 위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여자근로정신대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용역을 통해 피해자들의 강제 동원 당시 생활상, 동원 장소와 시기·방식, 이동 경로, 그리고 현지 근로 실태를 파악한다. 귀국 시기 및 경로와 정착지, 질병이나 장애 여부 같은 귀국 후의 생활 전반도 조사할 계획이다. 연구는 피해자 22명에 대한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로 진행된다.


지난해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및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최초의 손해배상 판결이었다.


권금섭 경기도 자치행정과장은 “역사적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도록 실태조사를 추진하게 됐다. 연구 결과는 향후 지원 계획 수립에 반영하고 그들의 사연은 교육책자 등으로 제작해 보전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경진 기자 lkj@donga.com

2019.03.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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