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배꼽티 행인을 봤나요…1990년대 그 시절 패션이 돌아왔다

[라이프]by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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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김혜영 씨가 주최한 90년대 콘셉트의 베이비샤워 파티 ‘83년생 김혜영’의 모습. 화려한 색상의 옷은 물론 짙은 립스틱 등 ‘세기말 감성’이 폭발했다. 참석자들은 서울 종로구 동묘시장과 SPA 브랜드 매장을 다니며 취향에 맞는 90년대 패션을 완성시켰다. 박지훈 씨 제공

반투명 색안경 위에 착용한 헤어밴드와 똑딱이 머리핀. 상반신에는 홀치기염색 크롭티(배꼽티)를 걸쳐 건강미와 활동성을 드러냈다. 한 손엔 형광색 파워숄더(어깨가 각진) 재킷을 들고 하의는 펑퍼짐한 배기팬츠(힙합 바지) 차림. 금방이라도 무리 지어 힙합 댄스를 출 듯하다.


1990년대 여성그룹 ‘디바’를 다시 본 이야기가 아니다. 제니, 설현, 선미, 현아 같은 아이돌 가수들의 요즘 공항 패션이나 화보 속 옷차림이다. 래퍼 비와이는 얇은 빨간 띠 로고가 선명한 벙거지 모자를 썼다.


1990년대 패션이 돌아왔다. 유별난 소수의 극한 ‘뉴트로(새 복고)’ 체험이 아니다. 올 여름 배꼽티를 입은 젊은 행인들에게서 20여 년 전의 환영을 봤다면 그것은 환영이 아닌 실제다. 시내 곳곳에선 요즘 1990년대 패션 파티도 열린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1990년대생 벨라 하디드, 켄덜 제너 같은 유명 모델이 약속한 듯 1990년대 스타일을 뽐내는 화보가 넘실댄다. 그 시절 그 패션은 어떻게, 왜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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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롭티 입은 현아

‘내 파티에 이승연, 문희준이?’

김혜영 씨(36)는 최근 출산을 앞두고 지인 15명을 초대한 베이비샤워 파티, ‘83년생 김혜영’을 열었다. 드레스코드는 ‘90년대 스타일’. 초청받은 참가자들은 행사 2주 전부터 분주해졌다. 서울 종로구 동묘와 광장시장부터 온라인 쇼핑몰까지 뒤지고 돌아다녔다. 눈길을 사로잡을 ‘그 시절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다.


당일 파티 현장에는 어두운 색 립 라이너로 빈틈없이 입술을 채우고 베레모를 쓴 배우 이승연, 힙합 바지에 헤어피스를 단 가수 문희준이 등장했다. 물론 연예인 본인이 아니다. 1990년대의 그들을 흉내 낸 참가자들. ‘모조 이승연’은 1990년대 TV 토크쇼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 진행 당시의 스타일을 감쪽같이 재현했다.


당대의 통신기기 삐삐부터 록 그룹 ‘Y2K’의 사인 CD, 루즈삭스, 헤어피스, 크롭티, 배기팬츠, 플라스틱 헤어핀과 베레모(빵모자)까지…. 이른바 세기말 감성이 폭발했다. 여성그룹 ‘샤크라’의 패션 콘셉트로 꾸며 파티에 참가한 박지훈 씨(33)는 “1990년대에 초중학생이었는데 당시에는 구매력이 없어서 해보지 못했던 루즈삭스 같은 것들을 이번에 직접 체험하니 즐거웠다. 이정현 같은 1990년대 가수를 보면 분장과 무대가 굉장히 파격적이다. 평소 무채색 옷만 입다 세기말 감성으로 꾸미니 자유로워진 느낌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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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TV 토크쇼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

Z세대 울린 X세대 감성

“캘빈 (클라인)과 나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아무 것도 없어요.”

1981년 배우 브룩 쉴즈가 모델로 등장한 캘빈 클라인 의류 광고 문구다. 당시 15세이던 쉴즈가 이 문구에 맞춰 도발적 포즈를 취했는데 논란과 함께 여성성과 섹시함을 강조한 캘빈 클라인의 인기도 반등했다.


38년 뒤, 캘빈 클라인의 새 모델인 17세 가수 빌리 아일리시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펑퍼짐한 옷을 입지. 아무도 그 속을 모르니까 몸매 품평을 못하잖아. 난 내 캘빈 속에서 진실을 말해.”

근 40년 차의 두 광고는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내면은 판이하다. 전자가 사회가 만든 전형적 여성상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개성과 다양성을 내세운다.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와 보수적 분위기를 1990년대 X세대가 자유와 개성으로 탈피하려 한 움직임이 패션에 남아 Z세대에 울림을 주는 형국이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1990년대 TV 뉴스 화면 속에서 배꼽티를 입은 여성이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친숙함과 과감함 사이

1990년대 패션 붐은 업데이트나 재해석이 아닌 동일 재현으로 가고 있다. 패션 회사들도 적극적이다. 프라다는 얇고 붉은 띠 모양 로고인 리네아 로사를 부활시키고 당시 유행한 나일론 백팩을 그 모습 그대로 재출시했다. 토미 힐피거도 1990년대의 로고 장식을 다시 사용한다.


과장된 색채 등 맥시멀리즘의 이면에 담백한 미니멀리즘이 공존한 것도 1990년대 패션의 강점으로 꼽힌다. 진정아 더블유 매거진 디지털 에디터는 “(고 존 F. 케네디 2세의 부인) 캐롤린 베셋 케네디, 모델 케이트 모스가 1990년대에 보여준 정제되고 담백한 스타일이 현재 스타일리시하게 받아들여진다. 첨단 경향을 과하게 좇는 것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20, 30대에게 1990년대 문화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친숙함이 있다. 1960~80년대 패션에 비해 동시대와 접점이 많고 실용적이란 점도 90년대 패션의 매력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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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정현의 패션

시트콤 ‘프렌즈’ 재공개 후 90년대 패션까지 화제

“‘프렌즈’ 의상 담당자님 제 의상도 평생 맡아주시면 안될까요?”

90년대 패션 붐은 시트콤 ‘프렌즈’로도 불어오고 있다. 넷플릭스가 ‘프렌즈’를 지난해 다시 공개하자 영미권 국가는 물론 국내 소셜 미디어에서도 ‘프렌즈 패션’이 화제다. 여성 캐릭터인 레이첼, 모니카, 피비의 패션에서 각자 개성이 잘 드러나, 이들의 옷만 캡쳐한 이미지도 전 세계로 공유된다.


제니퍼 애니스톤이 연기한 레이첼 그린은 당시에도 패션 아이콘이었다. 풍성한 볼륨에 레이어드를 준 어깨 길이의 머리는 ‘레이첼 스타일’이라는 고유 명사가 됐다. 데님의 다양한 활용, 영화 ‘클루리스’식 체크무늬, 짧은 셔츠 끝단을 질끈 동여맨 스타일이 ‘레이첼표’ 패션이다.


보헤미안(집시)의 의상을 멋지게 재해석했다는 의미의 ‘보호 시크’라면 단연 피비 부페이(리사 쿠드로)다. 시트콤 속에서 ‘4차원’ 캐릭터로 등장한 그녀는 사이즈가 큰 꽃무늬 원피스나 갈색 계열의 스웨이드를 즐겨 입었다. 화려한 색감으로 자유분방함을 연출한 것도 특징이다.


당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모니카 갤러거(코트니 콕스)의 패션이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유명 글로벌 패션 브랜드 쇼핑몰인 ‘네타포르테’는 여름 트렌드로 모니카의 패션을 선보였다. DKNY를 연상케 하는 하이웨이스트 진이나 더블브레스트 재킷에 검은 쇼트커트 헤어까지. 단정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그녀의 패션이 90년대 ‘놈 코어’(평범함의 극치) 패션 아이콘이라면서 말이다.


‘그 시절 패션’을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밀레니얼 세대의 열광 덕분일까? 넷플릭스는 지난해 ‘프렌즈’ 방영권을 올해 말까지 1년 연장하며 무려 1억 달러(약 1194억 원)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19.09.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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