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추억이 되고, 포스터는 예술이 된다

[컬처]by 동아일보

관객 눈길 잡아채는 한컷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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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온라인 캡처 제공

봉준호 감독조차 ‘기생충’ 포스터의 의미를 몰랐다. 포스터 제작을 맡은 김상만 감독이 배우들의 눈을 가린 건 관객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보길 원했기 때문.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김 감독은 인간관계의 균열과 상류층의 삶을 세련되지만 건조하게 담은 데이비드 호크니, 에릭 피슬의 회화를 떠올렸다. 물론 유명 배우들의 눈을 가린다는 부담도 컸다.


해외에서도 회자된 이 포스터는 미국, 일본, 베트남의 여러 극장에 그대로 걸렸다. 배경은 다르지만 눈을 가린 콘셉트는 프랑스에서도 유지됐다. 김 감독은 “칸에 가기 전 만난 봉 감독은 포스터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럼에도 눈을 가린 이유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고 전했다.


과거, 영화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됐던 포스터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사례는 비단 ‘기생충’뿐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서는 국내외 포스터들을 모아 놓고 품평(?)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만큼 업계에서는 “관객들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말들이 많다. 소규모 인원으로 포스터를 제작해 온, 10개 내외 국내 디자인업체들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장르나 분위기를 주로 담는 해외 포스터와 달리, 그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들은 배우 얼굴을 클로즈업한 ‘얼굴빵’ 포스터가 유독 많았다. 배우 인지도에서 오는 티켓파워나 소속사, 배급사, 제작사 등 논의 과정에서 “직관적인 이해가 중요시됐기 때문”이다. 공유, 정유미, 마동석 등 배우들이 뛰고 있는 ‘부산행’(2016년) 포스터는 해외로 가면서 폐허가 된 부산역 전경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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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프로파간다·피그말리온 제공

변화는 상대적으로 창작의 자율성이 보장된 다양성 영화들로부터 시작됐다. “요샌 굿즈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소장 욕구를 자극해야 한다”는 최지웅 프로파간다 실장의 말처럼, 아기자기하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포스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여전히 잘 먹힌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다룬 ‘벌새’(8월 개봉)는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의 보편성을 담기 위해 은희(박지후) 사진 대신 파스텔톤 일러스트를 활용했다. 박시영 빛나는 실장은 “20대 힙스터 관객과 일반 관객 사이 적정한 콘셉트를 항상 고민한다”고 했다.


입소문을 탄 국내 포스터가 해외에서 만든 포스터를 대체하기도 한다. 시리아 난민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가버나움’(1월 개봉)은 오리지널 포스터의 우울함을 줄이고자 소년 뒤 하늘을 보라, 핑크빛 색감으로 편집해 역으로 해외 극장에 널리 쓰였다. 그자비에 돌란 감독이 피그말리온에서 제작한 ‘마미’(2014년) 포스터를 보고 SNS에 “내 영화 포스터 중 한국이 최고”라고 극찬한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디즈니, 마블 영화는 해외에서 제공한 스틸컷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한글로 변환하는 작업조차 로고 규격을 맞추는 등 여러 제약이 따른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들은 여전히 창작의 자율성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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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스테디 제공

제한적이지만 상업영화의 기존 작법 안에서 소소한 변화들도 나타나고 있다. 프로파간다가 작업한 ‘증인’(2월 개봉)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정우성, 김향기가 마주 보고 있는 감성적인 포스터를 썼다. ‘악인전’은 마동석과 김무열 사이로 악인이 휘갈겨 쓴 듯한 글씨체를 삽입해 하드보일드한 극 분위기를 살렸다. ‘얼굴빵’ 포스터이지만 ‘나를 찾아줘’(27일 개봉) 포스터 제작을 맡은 스테디는 이영애에게 슬픈 표정과 미스터리한 동작을 주문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정신병원 외경을 담은 ‘곤지암’(2017년)에 이어 ‘변신’(8월 개봉)은 오컬트(초자연적 현상) 장르의 직관적인 이미지보다 스산한 집 안에 배우들이 앉아있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안대호 스테디 실장은 “공포물 작법도 핏빛 없이, 분위기만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2019.11.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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