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 쓰는 것이 더 쿨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가 수리 선언'

[테크]by 김국현
고쳐 쓰는 것이 더 쿨해. 세계 곳곳
세상은 편해져 물자가 흔해졌다. 감히 살 수 없었던 상품들이 이제는 소모품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부담 없이 소비한 뒤, 좀 쓰다 버리는 경우가 많다.

 

수선(修繕)이라는 말은 예스러워져 버렸다. 옷이 해지면 당연히 수선해서 입는 것이라 알았건만, 지금은 SPA 매장에서 사는 게 빠르고 때로는 더 저렴한 것처럼 느껴진다. 제3세계로부터의 수입공산품이 자국 내의 인건비보다 저렴해진 나라들의 풍경이다. 하지만 양품(良品)을 귀하게 아끼던 시대에서 싸구려를 많이 소비하는 시대가 된 것이 문명의 진보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풍토가 유럽식 삶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나 보다. RREUSE (Reuse and Recycling Social Enterprises in the European Union)라는 범유럽 비영리 단체가 결성되어 수리에 대해서는 부가가치세 전면 면제와 소득세 공제를 주장하고 나선 것.

 

이미 스웨덴에서는 물건을 수리하면 그만큼 세액 공제를 해주는 제도가 도입 중이다. 전자제품이나 차량은 물론 의복까지 포함되는데,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납세자의 행동이라는 신호를 주는 것.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리를 의뢰하게 되면 그만큼 부가가치세가 발생한다(북구답게 부가가치세는 이미 25%). 스웨덴에서는 올해부터 이를 반으로 깎아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수리업자에 지불한 인건비 반을 소득세에서 환급해 주자는 법안까지 올라가 있는 것. 비슷한 법안은 오스트리아에도 제출되었다.

 

물론 소비가 계속 일어나야 경제가 순환되고 경기가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스웨덴인은 다르게 생각한 것 같다.

 

‘메이커 무브먼트’나 공유경제라는 21세기적 철학에 대한 신뢰는 차치하더라도,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사회가 과연 그렇게 바람직하기만 한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인 경제 활동이다. 다른 나라 공장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을 반복 구매하는 것보다, 우리 동네에서 수리하고 수선하는 편이 일자리라도 더 만들지 모른다.

 

그러나 IT제품의 수리산업은 점점 쉽지 않아지는 시대다. 특히 애플의 제품들을 보면 수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유통망에서조차 수리를 포기하고, 누구 손을 거쳤는지 알 수 없는 리퍼 제품으로 갈음해주곤 한다. 마치 미래의 전자제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는 듯, 1~2년에 한 번꼴로 갈아타 줘야 한다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풍조에 반기를 든 이들이 있다. 이미 미국 12개 주에서 공정 수리(Fair Repair) 법안의 법제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인 것. 모든 소비자에게 직접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 지금은 공인 서비스센터에서만 필요한 정보와 자재를 독점하고 있다. 적어도 IT 산업이 자동차 산업만큼만이라도 수리 친화적으로 되자는 노력이다.

 

이 법안이 법이 되지 않도록 로비하는 이들 또한 애플과 같은 제조사들이다. 손을 벨 수도 배터리가 터질 수도 있으니 자가수리는 위험하다는 것. 그들의 로비 덕에 작년 뉴욕에서 법안은 부결되었다.

 

나도 대표적인 수리 커뮤니티 아이픽스잇의 '자가 수리 선언'(Repair Manifesto), “고칠 수 없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는 성명에 도취한 것이었을까?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최근 수리 가능 점수 10점 만점 중 1점으로, 초고난이도에 속하는 12인치 맥북을 개복(開腹)했다. 덜렁거리던 힌지를 조이고, 정상 대비 55%까지 떨어져 버린 배터리를 교체했다. 말은 쉽지만 2시간의 사투였다. 궁상맞아 보이기도, 인건비를 생각하면 손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애장품을 수리한 2시간은 서스펜스와 흥분과 클라이맥스로 이어진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근거리며 다시 전원을 넣을 때 밀려드는 생환의 감동. 그렇게 다시 만난 제품에는 더 없는 애착이 생긴다. 다시 소생시켰다는 자기효능감도 보너스로 찾아왔다. 손때가 묻은 제품이란 내 세포가 묻어 있는 제품들, 오랜 물건엔 신이 깃든다는 주술적 믿음도 그 순간만큼은 망상만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의 삶이란, 스웨덴처럼 1일 6시간 노동을 사회 실험하는 곳이어야 하루 2시간이 남으니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낡고 헐었어도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제품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유행 신상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멋진 것이라는 상식이 퍼져야 가능한 일일 것 같기도 하다.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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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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