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폭스 57, 퀀텀의 의미

[테크]by 김국현
파이어폭스 57, 퀀텀의 의미

때는 2000년 이맘때였다. 찬 바람이 겨울의 도래를 알리던 날, 침묵에 빠져 있던 넷스케이프에선 홀연 버전 6가 등장했다. 인터넷 시대를 열었던 넷스케이프의 존재감은 이미 스러져간 시절, 그들도 아예 AOL에 인수된 뒤였다.

 

대작이 될 것이라고 풍문이 자자했던 인터넷 익스플로러(IE) 6의 베타 버전을 의식한 듯, 버전 5는 건너뛰었다.

 

그렇게 등장한 넷스케이프 6의 가장 큰 특징은 웹표준을 본격적으로 의식한 신형 브라우저 엔진 게코(Gecko)가 탑재되었다는 점 뿐이었다. 그 의미를 당시는 모두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게코의 탄생 비화는 흥미롭다. 넷스케이프가 IE에 밀려났던 지난 세기말, 넷스케이프는 역전을 위한 반격의 카드로 전면 오픈소스화를 내걸었다. 리눅스의 성공에 자극받아 오픈소스로 인터넷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모질라 프로젝트가 별도로 가동된다. 모질라는 사실 넷스케이프의 마스코트이자 넷스케이프 1.0의 코드명이기도 해서 모자이크(대중에게 알려진 사실상 최초의 웹브라우저) 킬러라는 의미였는데, 고질라하고 발음도 비슷하여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95년 급히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만들기 위해 모자이크를 라이센스했고, 인터넷 익스플로어에는 거의 버전 6까지도 모자이크의 소스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실 넷스케이프의 버전이 4에서 6으로 건너뛰게 된 것은 종래의 자산을 파기하고 새롭게 재출발하기로 한데서 기인하는데, 그 핵심이 바로 게코였다. 모질라 안에 게코 도마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외우기도 쉬웠다.

 

게코는 분명 당시 기준으로 빠르고 가볍고 무엇보다도 여러 OS에서 쓸 수 있는 크로스 플랫폼이었다. 하지만 윈도우에 원래 들어 있고 윈도우에 최적화된 IE만으로 대부분의 사용자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굳이 무언가를 새로 깔아야 할 필요를 못 느꼈었고, 윈도우가 컴퓨터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IE6은 웹표준의 준수보다는 HTML의 요소 하나하나를 보편적으로 조작가능하게 하자는 유니버설 캔버스 구상에 충실, 그 완성형으로 기대되었다. 액티브X 천국의 토양이 튼튼해진 순간이었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 이 6의 전쟁은 IE6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리고 무려 5년간 IE는 버전업조차 없는 태평성대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사이 AOL은 게코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모질라 ‘재단’이 탄생,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이 게코는 모질라의 대표작 파이어폭스의 혼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이 게코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노쇠해졌다. 게코를 OS로 만들기 위한 boot2Gecko(Firefox OS)도 실패해버렸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모질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퀀텀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시하여, 차세대 파이어폭스를 준비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성과가 처음으로 일반 공개된 것이 바로 57버전. 퀀텀은 끝이 아니라 57부터 시작될 긴 여정을 뜻한다.

 

암흑기였던 2013년, 제로에서부터 다시 만들기 시작한 실험적 브라우저 엔진 서보(Servo). 그 성과를 조금씩 파이어폭스로 이식해 가기로 한 것. 서보의 완성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만들어지는 대로 파이어폭스 퀀텀에 붙여 나가기로 한다. 이 서보는 또한 모질라가 탄생시킨 신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러스트(Rust)로 짜이고 있으니, 어떠한 역경 하에도 살아남아 무언가를 잉태하는 야생의 생존능력이 존경스럽다. 상표권 때문에 바뀔 수밖에 없었지만, 파이어폭스의 원래 이름은 피닉스 브라우저. 지금도 파이어폭스의 아이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불사조의 느낌이 난다.

 

우리 모두 살다 보면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파이어폭스처럼 새 출발이 필요한 날이 온다. 사실 그 발판이 되는 것은 무모해 보이는 평소의 실험 정신이다. 서보도 러스트도 처음에는 실험이었다. 사실 지금 4대 웹브라우저가 공히 지원하며 화제의 중심에 놓이게 된 차세대 기술 웹어셈블리도 모질라에서 시작한 asm.js 등의 실험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일 들이다.

 

웹은 그 어떤 기업으로부터도 속박받지 않고 미래를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현존 유일무이한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비영리 재단이 이 정도의 일을 해내다니 이는 그 이상에 찬동해 소집된 오픈소스 기여자들 덕분이고, 파이어폭스는 이들 혁신가의 실험실이자 놀이터였다.

 

혁신은 반드시 돈 잘 버는 초거대기업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한때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그늘에 가려, 지금은 다시 크롬의 그늘에 가려, 주인공은 되지 못했지만 참된 자유를 꿈꾸며 미래를 찾아가는 파이어폭스에게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다.

 

파이어폭스 57을 내려받는 것은 이들을 위한 작은 응원인 셈이다.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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