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 25주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

[테크]by 김국현
루비 25주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 세상에는 정말 별처럼 많은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추적되는 것만 수백 개, 여기에 각종 파생 언어나 방언을 포함하면 수천 개로 추정되니 셈하는 것이 덧없다. 지금도 수시로 프로그래밍 언어는 고안되어 세상에 선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우리 눈에 보일 정도로 크고 빛나는 별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외국어처럼 우리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습득해야 하는, 어휘와 숙어와 용례가 있는 엄연한 언어다. 따라서 중국어를 새로 공부해야 할지 영어를 더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 고민이 개발자들에게는 늘 뒤따른다.

 

그 고민을 덜기 위해 어떤 언어가 지금 비중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지표로 TIOBE 인덱스가 유명한데, 각종 검색엔진에서 그 언어로 검색했을 때 얼마나 많은 검색 결과가 돌아오는지로 중요성을 판정한다. (안타깝지만 한국의 검색엔진은 파싱 불가라는 이유로 산정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올 3월 인덱스 순위는 다음과 같다. 

 

Java (14.941 %)

C (12.76 %)

C++ (6.452 %)

Python (5.869 %)

C# (5.067 %)

Visual Basic .Net (4.085 %)

PHP (4.01 %)

JavaScript (3.916 %)

Ruby (2.744 %)

SQL (2.686 %)

 

오늘은 이 중에서 올해 25주년을 맞은 루비를 주목해 보자. 최근 다소 조용했지만 10위권에 다시 안착하게 된 루비. 루비의 존재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루비의 오늘을 이루게 한 것은 모두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자바, C#은 아예 대기업에 의해 만들어졌고 파이썬은 구글이 활용하고 밀어줬지만, 루비에게는 초거대 스폰서가 없다. 게다가 백인 주류 사회의 배경도 없는 일본산이다. 또 일본에서도 도쿄가 아닌 지방의 중소 하청 IT 회사 사원이 시작한 대장정이었다.

 

90년대 초반. 펄(Perl)처럼 문자열 처리에 강점을 보이는 스크립트 언어가 UNIX 등에서 널리 쓰였지만, 그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던 시절. 동시에 때는 오브젝트 지향 언어에 대한 로망이 충만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1993년 2월 마츠모토 유키히로(통칭 Matz)는 루비의 개발을 시작한다. 그는 일본 어느 지방 작은 SI 회사의 입사 3년차 사원. 80년대를 풍미했던 버블이 터진 불황. 그 회사도 신규안건 없이 유지보수로만 버텨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직원이 되면 함부로 직원을 정리할 수도 없는 일본이기에, 마츠모토는 한가한 시간을 틈타 루비를 개발한다. 95년 일반 공개될 때까지 이어진 불경기. 루비를 만든 것은 불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느 프로그래밍 언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공개해도 실제로 쓰는 이는 거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시기는 웹과 인터넷이 대중화되며 모두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하던 시절. 이를 취재하던 컴퓨터 잡지들은 건재했고 아직 활기가 있었다. 덕분에 1997년 무렵 일본 컴퓨터 잡지 등에서 특집 기사로 다뤄지기 시작하며 인지도를 조금씩 넓혀 간다. 그리고 1999년 마츠모토 자신의 저작이 출간되고, 이듬해 미국에서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팔리면서 입지를 잡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특이한 언어. 개념 잡기 쉽고 공부하면 나름 재미있지만, 특별히 어디에 쓸지 잘 모르겠는 언어 정도였다. 하지만 루비에게는 큰 잠재력이 있었다. 바로 펄을 대체하기 위해 등장한 만큼(이름도 그래서 진주보다 값진 루비), 거대한 문자열을 알차게 다루기에 적합한 스크립트 언어였는데, 웹이야말로 일종의 거대한 문자열이었다.

 

2005년경, 덴마크의 청년 프로그래머 DHH(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핸슨)가 루비를 활용한 본격적인 웹 개발 기반 ‘루비 온 레일즈(RoR)’를 공개한다. 웹2.0 붐과 함께 찾아온 루비 온 레일즈. 루비 보급의 결정타가 된다. 실리콘 밸리가 아닌 일본과 덴마크의 합작으로 쿨하고 힙한 스타트업 힙스터 언어의 대명사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이를 둘러싸고 루비 생태계라 불릴만한 라이브러리 패키지 관리체계가 정리되기 시작했는데, 마치 현대 자바스크립트 대폭발에 npm의 역할이 컸던 것처럼, 나만의 gem(보석)을 만들어 라이브러리를 공개하는 재미가 루비 커뮤니티를 타오르게 했다. 이 루비 커뮤니티는 자바와 씨름하며 SI 회사 생활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엘도라도로 비치게 되고, 젊고 자유로운 웹 기업을 상징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루비는 이처럼 철저히 비주류를 훑어온 예외적인 성공사례다. 변변한 스폰서도 없었다. SI 기업에서 서버를 담당하던 동료가 봐줘서, 회사 서버에서 루비를 공개한 이야기라든가, 출퇴근 통근길에 회사 일을 다 끝마쳐 놓고, 업무시간 내내 루비 개발을 하고 있었다는 도시 전설 모두 지나고 나니 훈훈한 이야기다. 실은 모두 알면서도 그 열정을 응원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또 말일성도 그리스도교(모르몬교) 선교사 출신답게, 마츠모토는 영어,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의 포교에 익숙했다. 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커뮤니티를 만들어 갔다. 말 그대로 Think global, act local의 정신으로 지방에서 세계를 꿈꿨는데, 2000년대 초반 해외 컨퍼런스에서 본 마츠모토는 칵테일 파티에서 늘 외국인과 둘러싸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설은 때때로 소박한 마이너리티로 시작한다. 실리콘밸리도 도쿄도 아닌 지방. 루비는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만들어지고, 지금 루비의 본거지는 인구 70만 시마네현의 작은 소도시 마츠에다. 마츠모토의 세 번째 직장이 있는 곳이자, 일본 리눅스 협회가 자리 잡았던 곳이기도 한데, 지금은 이 일본열도 서해안의 작은 도시가 일본의 실리콘밸리를 꿈꾸고 있다. 이곳에서 ‘루비 월드 컨퍼런스’가 열리고, 지방 정부도 지역진흥책의 일환으로 오픈소스를 밀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지난 10년간 IT 기업이 30사나 늘었다고 한다. 루비 이펙트다.

 

루비는 대기업이나 정부 정책이 만들지 않았다. 우리에게 루비와 같은 훈훈한 스토리가 드문 이유는, 대기업의 활약이나 정부자금이 모자라서가 아닐 것이다.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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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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