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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

by한겨레21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통해 국가폭력의 민낯 고발한 <국가에 대한 예의>

강경대, 김귀정… 죽음의 목격자이자 당사자인 ‘91학번’들이 그린 1991년 5월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

한겨레/ 한겨레/ 사람사는 세상 영화 사 제공

1991년 5월, 정확히는 4월26일부터 5월25일까지 3명이 타살되고 8명이 분신자살한 그 시기는 ‘분신 정국’ 또는 ‘5월 투쟁’기라고 기록됐다. 앞의 것은 운동권이 목숨마저 투쟁 수단으로 동원했다고 비난하는 세력이 붙인 이름이고, 뒤의 것은 국가폭력의 무자비성과 목숨 건 투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중에 붙인 이름이다. 어느 쪽이든 1991년 5월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고 들추기 싫은 역사였다.

3명 타살, 8명 분신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

시위 중 백골단의 진압에 숨진 김귀정씨의 운구 행렬이 1991년 6월11일 모교인 성균관대로 가고 있다. 한겨레

4월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시위 중 백골단에 맞아 숨진 것이 시작이었다. 여기에 항의해 사흘 뒤인 4월29일 전남대 여학생 박승희가 몸에 불을 붙였고, 이어 5월1일과 3일에는 안동대 김영균과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죽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과 노동자 윤용하, 이정순이 앞선 대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신했고 보성고 3학년생 김철수와 학교 선배 정상순도 이들의 뒤를 따랐다. 8명이 분신해 죽어가는 동안 또 다른 타살도 있었다. 5월6일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구속 뒤 입원한 병원에서 추락한 주검으로 발견됐고, 5월25일에는 성균관대 여학생 김귀정이 시위 중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질식사했다.

 

연이은 죽음 속에 전개된 1991년 5월의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은 총 2361회의 집회가 열리고 최대 40만 명이 참여하면서 6월 항쟁 때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6월 항쟁 같은 전 국민적 항쟁의 상상력은 결국 현실화하지 못했다. 잇단 죽음은 분노보다 더 큰 공포를 가져왔고, 노태우 정권은 정원식 국무총리 달걀 투척 사건을 기화로 학생들을 스승에게 폭력을 가한 패륜아로 몰아 공세를 퍼부었다. 더욱이 검찰이 제기한 김기설 유서 대필 의혹은 명확한 반증이 있음에도 피의자 강기훈에게 실형이 선고되면서 사실로 굳어졌고, 이에 따라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이 있던 1986년부터 꾸준히 제기돼온 ‘분신 배후설’도 정설처럼 여겨지게 됐다.

 

1991년 5월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스승을 폭행한 패륜, 그리고 자살 방조와 사주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마감됐다. 이후 한동안 그것을 상기시키는 일은 금기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르자 그때를 복원하고 반추하고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이따금 나타났다. 2001년 강경대와 같은 명지대 1학년이던 김환태가 다큐멘터리영화 <1991년 1학년>을 제작했고, 학계에서도 ‘91년5월투쟁청년모임’이 결성돼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세상에 선보인 다큐멘터리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도 1991년 5월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다. 이 영화가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은 초점이 1991년 5월 투쟁이나 그 상징인 열사의 죽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91학번’들 집단 발의로 만든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는 잇단 죽음보다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조작해낸 ‘유서 대필 사건’을 다루고 더 정확하게는 그 중심에 있던 강기훈이란 한 인간이 겪은 고통과 슬픔, 치유 과정을 그리고 있다. 1991년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기훈은 김기설의 유서 대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가,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로 5년 만인 2012년 대법원 재심이 개시돼 2015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강기훈이란 이름에 그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채무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잇단 죽음과 함께 오랫동안 잊혀 있었다. 영화는 1991년 5월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런 강기훈을 등장시켰고, 그것은 투쟁과 저항의 이름이 아니라 한 인간과 그에 대한 채무로써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감독 권경원은 91학번이다. 이 영화는 다수의 91학번들이 크게 힘을 보태 만들었다. 그렇다면 2001년 <1991년 1월>을 제작한 김환태에 이어 2017년 또다시 1991년 5월을 소환한 91학번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체 어떤 존재일까.

 

5월 죽음의 출발이었던 강경대와 동년배인 이들이 겪은 죽음은 1991년 5월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90년, 그들은 같은 고등학생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1990년 6월4일 충남 공주 한일고 최성묵, 6월5일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 9월8일 대전 충남고 심광보가 각각 음독과 투신과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모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탄압에 항의한 죽음이었다. 1991년 5월 분신한 세 대학생도 모두 대학 2학년생으로 또래나 마찬가지였다.

 

대학 입학을 전후해 연이어 동년배들의 죽음을 봐야 했던 갓 스물의 이들은 죽음의 목격자일 뿐 아니라 죽음의 당사자일 수도 있었다. 1987년 9월 전교조의 전신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가 창립되고 얼마 뒤인 12월19일, 4·19 이후 최초의 고등학생 조직으로 평가받는 ‘서고련’(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이 출범했다. 1989년 전교조 창립을 전후해서는 수많은 고등학생이 ‘고운’(고등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전교조 사수 투쟁을 했다. 1990년 죽은 고등학생 3명뿐 아니라 1991년 5월 분신한 세 대학생 역시 고운 출신이었다. 세 대학생에 이어 분신한 고교생 김철수도 사망 당시 고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89년 말까지 전교조 지원 활동과 관련해 전국에서 중·고등학생 150명이 퇴학, 무기정학 등 중징계를 받았다. 징계와는 별도로 사법 처리된 학생만도 15명이었다. 1990년에는 7월 초까지 12개 학교에서 58명이 징계를 받았다. 서울 구로고에선 학생회장이 전교조 교사의 구속에 항의해 3층 교실에서 투신했으나 목숨을 건지는 일도 있었다. 죽고 다치고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그만두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이혼하는 일을 수시로 겪고 보아야 했던, 한국 사상 초유의 ‘고딩’들이었다.

 

감독과 영화를 발의한 91학번들이 고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고운 출신이라면 스스로 죽음의 당사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고, 고운과 무관하더라도 또래의 죽음을 고교와 대학에서 연거푸 목격한 비운의 세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신 정국의 이름이든 5월 투쟁의 이름이든 그 세대가 느낀 고통과 슬픔은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 고운 출신의 소설가 하명희는 제2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자전적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의 수상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검찰 범죄에 조력한 또 다른 방조범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

노태우 정권의 ‘유서 대필 사건’ 조작 피해자인 강기훈(왼쪽)씨가 1991년 6월24일 검찰에 출두하기 위해 서울 명동성당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했으며,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왜 우리는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언론으로부터 ‘패륜아’로 낙인찍혀야 했으며, 왜 우리들은 길고 오랜 침묵을 지켜야만 했는지를. 당시 해직되었던 전교조 선생님들도 복권이 되었는데, 그때 학교에서 쫓겨났던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왜 아무도 그들의 삶을 물어주지 않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하명희가 잊히기를 거부하며 소설로 자신들의 얘기를 하려 했다면, 영화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름으로 강기훈을 소환한다. 1991년 5월의 죽음에 씌워진 오명의 모든 책임은 강기훈이라는 한 인간에게 지워졌고 그것은 무려 24년이나 지속됐다. 영화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 지방자치선거에 치중하며 사건을 외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야당을 포함해 한국 사회의 다수가 강기훈을 ‘자살방조범’으로 만든 검찰의 범죄에 조력한 또 다른 방조범이었던 셈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강기훈에게 미안함과 채무감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1991년 5월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강기훈을 소환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역설적이다. 하나는 수많은 채무자를 놔두고 그 또한 죽음의 한 피해자인 감독이 채무 당사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당사자일 수도 있었던 목격자가 그 죽음의 가장 큰 피해자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하려 했다는 점에서다. 감독의 채무감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누구보다 내상이 컸을 91학번이 왜 다수가 방기한 채무를 떠안으려 했을까? 왜 투쟁과 저항의 이름이 아니라 강기훈으로 그 시절을 기억하려 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차분하지만 곳곳에 숨은 암시가 관객을 긴장시킨다. 박승희의 전남대 선배가 검찰이 한동안 자신의 뒤를 캤다고 얘기하는 장면은 그 시절 강기훈이 아닌 누구라도 자살방조범으로 몰릴 수 있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강기훈은 바로 우리라고, 그가 겪은 고통은 우리를 대신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또 강기훈의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데 1991년 5월에 대한 감독 자신과 우리 안의 상처는 한 인간이 감당해온 기나긴 고통과 슬픔이 치유될 때 함께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무명의 다수가 만든 역사

1991년 5월은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로 기억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와 시민이 죽음의 행렬에 함께 있었다. 영화는 이제 기억마저 흐릿한 이름 셋을 호명한다. 버스 안내양과 가발공장 ‘시다’(보조노동자), 중국집 요리사였던 가톨릭 신자 이정순, 중국집 배달원과 가방공장 노동자였던 윤용하, 뚜렷한 직업이 알려지지 않은 정상순이 그들이다. “대학생들은 추모사업회라도 있지만 우리는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기에 세 사람의 가족이 모여 따로 추모제를 지낸다”는 이정순의 여동생이 한 말을 빌려 감독은 1991년 5월뿐 아니라 역사에서 늘 간과돼온 무명의 노동자와 도시 빈민을 상기시킨다.

 

강기훈의 심리상담 중 의사가 “사소하게 한번 살아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큰 명분이 있는 투쟁과 저항만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과 무명의 다수도 역사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에 불러낸 고교생 김철수의 목소리도 ‘열사’의 유언이 아니라 27~28년 전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그들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영화 제목 ‘국가에 대한 예의’가 ‘인간에 대한 예의’의 반어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임미리 한신대 사회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