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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뭔가에 미쳤었는데 그건 자유였더라

by한겨레

1970년대 광화문통 청년들 

중고교·학원 밀집한 광화문 일대 

70년대 들어 청년문화 중심 부상

영화관·음악감상실 젊은 발길 북적 

‘꼰대’ 거리 된 명동·충무로와 대조 

대학생이 중심돼 방향 이끌었지만 

중고생·재수생이 문화 토대 이뤄 

음악 있는 분식집 운영한 전인권 

“우리만의 색깔로 세상을 튜닝”

뭔가에 미쳤었는데 그건 자유였더라

1970년대 청년문화는 대학생들이 방향을 잡았으나, 고교생과 이때부터 크게 늘어난 재수생들이 토대를 이뤘다. 종로 등 4대문 안에 밀집한 고교와 재수 학원을 중심으로 70년대 청년들은 종로와 광화문 일대로 모여들었으며, 포크송과 고고 리듬의 음악을 주로 즐겼다. 사진은 1975년 4월 경기도 일영과 장흥 등 서울 외곽을 연결하는 교외선 기차 안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와 춤을 추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 <사진으로 보는 서울 5>

같이 살고 있어도 같은 세상을 사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거기 같이 있었던 내 자식과 내 부모도 똑같이 경험하고 느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기억하던 세대에게 1960~70년대 세종로와 광화문 네거리의 변화는 자부심 넘치는 변화였을 테지만, 1970년대의 청소년들에게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민회관과 국제극장, 미국대사관 건물의 현대성은 이제 감동스러운 게 아니었다. 1960년대 말부터 콘크리트 광화문과 이순신 동상이 세워지면서 세종로의 외양은 크게 변화했지만, 이 역시 사람마다 꽤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감격스러웠을 수 있고, 4·19에 그 거리에서 피를 흘렸던 사람들은 박정희의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선회가 크게 우려스러웠을 것이고, 서울에서 자라며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아이들은 그저 ‘꼰대’들의 촌스러운 짓이라 치부하며 삐딱한 표정으로 그 동네를 헤집고 다녔을 수 있다.

 

그랬다. 정말 1970년대 초, 그 거리는 청소년들이 헤집고 다니는 곳이 되었다. 언제든 청소년이 없는 시대가 있었으랴마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식민지와 전쟁 경험이 없는 세대로 한글과 우리 역사, 미국식 민주주의 등을 학교에서 배우고, 미국식 자유주의를 동경하며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데모하는 것을 늘 보면서 성장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후 분위기에서 태어난 이들은 엄청난 ‘다수’였고, 어른들은 이 ‘새나라의 어린이’들을 잘 키워보려고 놀라운 교육열을 보였다. 초등학교는 2~3부제에도 콩나물교실이었고, 대학을 가기 위해 중·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 수가 폭증하고 있던 추세였다. 일류 학교 진학을 위한 치맛바람이 드세졌고, 입시 대비 참고서와 학원도 성황을 이루었다. 청년문화가 전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은 단지 몇몇 뛰어난 대중음악인과 영화인의 힘 때문이 아니라 195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도달하면서 청년문화의 거대한 향유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고교 평준화로 종로에 활기

이와 함께 세종로와 종로는 다시 새로운 활력을 갖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중심지였던 세종로와 종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개발한 명동과 충무로에 중심지의 권위를 내주었고, 1960년대까지도 수많은 ‘명동백작’과 장안의 청춘남녀가 화려한 명동의 활력을 유지했다. 물론 1970년대에도 명동은 여전히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청소년에게 명동은 이미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그들의 번화가였다. 명동의 옷가게와 술집, 음식점은 너무 비싸 중고생은 물론 대학생조차 드나들기 힘들었다. 그에 비해 이들이 만만하게 헤집고 다니던 거리는 종로와 세종로였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하략)

 

이장희 ‘그건 너’ 2절(이장희 작사·작곡, 1973)

 

주인공은 거리에서 ‘동창생’을 만난다. 대도시에서 성장하여 계속 학교만 다니던 이 세대 아이들의 인맥은 지연이나 혈연이 아닌 학연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노래의 주인공도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인물이 우울한 마음을 드러내며 편하게 헤매고 다니는 거리가 종로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서울의 중산층 청소년들의 근거지가 바로 종로였기 때문이다.

 

당시 종로와 세종로 부근에는 명문 중·고등학교가 밀집해 있었다. 경기·서울·경복·중앙·배재·양정·휘문·보성 등의 남자 중·고교, 경기·이화·숙명·진명·정신·창덕·풍문·덕성 등의 여자 중·고교가 모두 종로 북쪽과 세종로 부근에 포진해 있었다. 그러니 광화문 로터리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길에는 이들이 이용할 공간들이 생겨났다. 종로2가를 중심으로 관훈동부터 관철동 부근에는 재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단과반 학원들이 생겼고, 그 맞은편에는 종로서적과 양우당 등의 대형 서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청소년들은 학교가 파하면 종로와 세종로로 몰려나와 학원에 가고 서점에 들렀으며, 와이엠시에이(YMCA)의 모임에 기웃거렸다.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가, 1974년도부터는 고등학교가 무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열 살 때부터 치열해지는 입시전쟁과 사교육 열풍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 보고자 한 것이겠지만, 결국은 대학입시에서 병목 현상이 생겨 더 뜨거워졌다. 1973학년도부터 서울시내 인문계 고교는 다 평준화되었고, 대학입시에서 생애 첫 경쟁적 입시를 만나게 된 아이들은 학원 단과반 한두 과목은 수강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때부터는 서울시 중심부뿐 아니라 외곽지역의 학생들도 다 종로거리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종로2가는 새벽부터 밤까지 학생으로 바글바글했다. 그 부근은 청소년이 들락거리는 점포들이 생겼다. 종로서적 바로 옆에 품격 있는 제과점 고려당이 있었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떡볶이와 어묵꼬치, 비빔냉면 등을 파는 ‘분식센터’(그땐 이렇게 불렀다. 뒤이어 ‘스낵코너’란 말로 대체되었다)가 청소년들에게는 훨씬 편했다. 가끔 세고비아 기타를 파는 악기점과 레코드 가게 앞에서 군침을 흘렸고, 대학생 문화를 흠모하던 축들은 ‘예술영화’란 걸 상영하던 프랑스문화원이나 클래식음악 감상실 ‘르네상스’ 등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뭔가에 미쳤었는데 그건 자유였더라

1970년대 중반 세종로와 종로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핫 플레이스’였다. 서울시내 주요 고교들이 시내 중심지 인근에 밀집해 있었으며, 양대 재수 학원인 종로학원(종로2가)과 대성학원(당주동)도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젊은층이 머무는 무대로 떠올랐다. 사진은 1975년 5월의 세종로 모습. 멀리 정면에 옛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건물이 보이며, 세종로 좌우에는 정부 세종로청사만 보일 뿐 교보빌딩과 세종문화회관 등은 아직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 5>

고교생이 늘어나고 입시전쟁이 치열해지자 재수생도 늘어났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재수생은 사회의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해마다 대학입시가 끝날 즈음엔 실의에 빠진 재수생의 자살 사건이 터졌고, 1976년 1월에는 대통령이 재수생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재수생을 위한 전일제 종합반 학원도 급성장했다. 당주동의 대성학원, 종로서적 뒤편 종로학원의 서울대반에 들어가는 일은 웬만한 대학입시보다도 힘들다는 소리가 나왔다. 대성학원과 세종학원 등이 있는 시민회관 뒤편 골목은 아예 재수학원 골목으로 불렸고, 광화문에는 발에 채는 게 재수생이라고들 했다. 두발과 패션이 자유로웠던 재수생들은 중고생의 아지트인 분식센터나 빵집만이 아니라 당구장과 술집, 고고장 등을 드나들 수 있었고, 세종로와 종로에는 이들이 즐길 곳들이 생겨났다.

 

청소년들이 즐기는 종로·세종로와 기성세대가 많이 찾는 명동·소공동은 음식점이나 술집부터 사뭇 다른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값싸고 편한 분위기의 종로·세종로를 즐겨 찾았다. 이들이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었고 부담 없는 가격의 음식과 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재수생 다룬 첫 소설 <광화문통 아이>

흔히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학생 중심으로 설명하는데 이 문화의 방향을 대학생들이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런 설명은 타당하다. 그러나 양적으로 보자면 대학생의 문화는 오히려 소수였다. 대학을 바라보고 있던 중고생과 재수생, 대입 포기 청소년 등은 대학생보다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이야말로 청년문화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토대였다. 그런 점에서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병태와 영자를 주인공 삼은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1974)이 나온 지 몇 년 뒤 절망한 재수생들을 다룬 윤정모의 <광화문통 아이>(1976)가 나왔음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몇 년째 광화문 학원가에서 쳇바퀴를 돌던 하림이란 남자와, 상실과 환멸에 젖어 있는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인 30살 여자 준희가 무작정 현실도피적인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광화문 학원가를 ‘제로지대’, 재수생들을 ‘바보 박사’라 자조한다. 예비고사가 끝난 12월부터 일찌감치 재수를 결정한 새 얼굴들이 세종로를 채우고, 게으름과 무력감을 못 견디며 당구장과 맥줏집으로 몰려가는 여름을 거쳐 다시 입시철로 되돌아오는 한 해의 흐름이 뚜렷한 곳이다. 매년 겨울마다 몇몇은 빠져나가고 몇몇은 또 암담한 한 해를 견뎌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재수생이 늘고 있다. 40만에서 어느새 60만이 되어간단다. 큰일이야 큰일”이라며 걱정을 늘어놓는 어른들의 입은 주먹으로라도 막고 싶어 한다. 어른들은 ‘문어처럼 먹물을 뿜’어 자신들의 ‘하얀 순수를 빼앗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세계에 가까이 가지 않게 조심하라 이른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디제이(DJ)박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며 종업원은 주문을 다그치지 않는 ‘A·R’란 생맥줏집 풍경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전인권의 자서전 <걱정 말아요 그대>(2005)에 그려진 그 시절 광화문 풍경은 이보다 훨씬 행복한 모습이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전인권은 삼청공원을 본거지 삼아, 같은 동네의 ‘춘길이 형님’과 어울리며 대중음악에 대한 안목을 높이고 그의 손에 이끌려 미8군 무대, 고고장 등의 무대에 서면서 대중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즈음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 뒷길에 있는 ‘음악감상실 겸 분식집’(!)을 운영했던 경험을 풀어놓는다. 떡볶이 파는 분식집인데 디제이박스가 있어서 좋은 음악들을 틀어주고 라이브로 노래도 부르며, 그러다 가수나 디제이들이 떡볶이 주문을 받고 서빙도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장소였다. 까까머리 중고생과 장발의 대학생과 재수생들이 얽혀서 매일 잔칫집처럼 먹고 떠들며 음악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곳이다. 전인권은 ‘우린 김민기도 아니고 한대수도 아니었다. 물론 이장희도 아니었다. 우리만의 색깔을 얘기해 줬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 그곳 손님들이 보는 세상을 정확하게 튜닝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애들은 뭔가가 있다는 것에 미쳐 있었다. 그것은 자유와도 일맥상통했다’라고 썼다. 청년문화는 1960년대 후반 대학생들이 모이는 세시봉에서 출발하여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중고생까지 들락거리는 공간들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지는 고교생과 재수생들의 거리인 종로와 세종로였다.

뭔가에 미쳤었는데 그건 자유였더라

가수 전인권은 1970년대 중반 즈음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광화문네거리 국제극장 뒷길에서 ‘음악감상실 겸 분식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이었지만, 디제이(DJ)박스가 있어 음악을 틀어주거나 라이브로 노래하기도 했다. 들국화 시절의 전인권(가운데)과 최성원(왼쪽), 주찬권씨. <한겨레> 자료사진

‘광화문 연가’의 추억으로 전락

이런 분위기는 1978년으로 거의 끝이 났다. 1979년 초 입시학원들이 사대문 밖으로 내쫓겼고 1980년대에는 재학생들의 과외와 학원 교육이 금지되었으며, 강남 개발로 북촌의 중·고교가 강남과 목동 등으로 하나둘 이전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하략)

 

이문세, ‘광화문 연가’(이영훈 작사·작곡, 1987)

 

1980년대 후반에 세종로와 종로를 추억의 공간으로 노래한 이 노래가 히트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대학생들이 노는 곳은 신촌과 대학로, 한강 건너 강남으로 흩어졌다. 노래는 ‘아직 남아 있어요’라고 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정동교회와 덕수궁, 그리고 그 공간에 깃든 추억뿐이다. 서울시청 앞에 ‘구토탄’이 터지고(1980년 5월14일 서울시청 앞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은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다), 광주에서 시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1980년에서 또 7년이 지나고, 다시 최루탄에 목숨을 잃은 이한열의 운구가 신촌을 출발하여 광화문네거리와 서울시청 앞에 백만 군중을 모았으니, 그나마 낭만적이었던 1970년대식 청년문화는 그저 추억으로만 남았다. 이 공간은 새로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