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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과 노라노

by한겨레

한국 첫 여성감독 박남옥

첫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가슴 뜨겁게 하는 그들의 삶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박남옥 지음/마음산책·1만4000원

노라노-우리 패션사의 시작/최효안 지음/마음산책·1만2000원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한복 차림에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지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 영화사에 기록도 자료도 전무하다시피 하던, 그래서 사진 한 장으로만 희미하게 자신이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었음을 증명하던 박남옥(1923~2017)의 일대기가 나왔다. 마음산책이 펴낸 ‘우리 여성의 앞걸음’ 시리즈의 <박남옥―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은 그가 생전 써놓은 원고들을 딸이 손수 타이핑하고 사진까지 보태 정리해낸 자서전이다.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왼쪽 사진)은 “아이를 등에 업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집으로 오는 길은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게 된다. ‘아주머니, 사진 찍으세요?’ 스무살 안팎의 젊은 아이가 찍겠다고 다가온다. 길가에서 스냅 사진 찍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아이와 무심코 포즈를 취한 이 사진은 40여년 후 한 젊은 영화학도에 의해 책에 실리게 된다”고 회상했다. 노라노(오른쪽 사진)는 90대인 지금까지도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반드시 하루 일곱시간씩 일한다. 마음산책 제공

6·25 전쟁이 끝나고 1년 뒤인 1954년.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영화를 보러 간 박남옥은 영화계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전쟁 미망인에 대한 영화를 찍기로 합의한다. 시나리오를 맡기고, 촬영기사를 구하고, 배우를 섭외하고, 출판사를 운영했던 친언니에게 돈을 빌린다. 촬영이 시작되고, 가장 큰 고민은 15명이나 되는 스태프의 점심식사. 매일 외식은 언감생심. 박남옥은 이른 아침 아기를 둘러업고 낙원시장에 장을 보러가 무, 시금치, 생선, 된장 등을 사와 점심을 준비해놓고 영화를 찍는다. 부산으로 가덕도로 로케를 다니며, 장비를 구하러 진주로, 돈을 구하러 친정 대구로, 하루가 멀다 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물론 등에는 돌도 되지 않은 아기가 늘 업혀 있었다. 마침내 촬영을 마치고 후시 녹음을 하기 위해 찾은 녹음실에선 “연초부터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는 없다”며 거절당한다. 찾아가 부탁하길 여러 차례, 결국 녹음을 마친다.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은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해 “기분이 좋아 담배 한 대를 입에 무는데 그때 김진규 옆에 서 있던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주었다”고 회상했다. 마음산책 제공.

영화 완성본을 보던 날에 대해 박남옥은 이렇게 회상한다. “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나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든 형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던 나는 영화 동지들의 그동안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미망인> 제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만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 그렇게 그는 제작자이면서 감독, ‘밥차 아줌마’이면서 배급자로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는 90대인 지금까지도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반드시 하루 일곱시간씩 일한다. 마음산책 제공.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미쳐 극장을 드나들며 자료를 모으고, 투포환 선수로 뛰면서도 명문 여고와 이화여전에 입학하고,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 일본 밀항을 3번이나 시도하다 실패하고, <대구매일신문> 영화평 기자로 일하다 영화판에 뛰어들기까지, 그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마음산책의 같은 시리즈 <노라노―우리 패션사의 시작>은 올해 아흔의 나이에도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노라노의 일대기다.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7살의 나이로 결혼한 노라노는 시집의 핍박 속에 이혼한 뒤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47년 한국에 상용 여객기를 최초로 띄운 노스웨스트항공사의 기록에서 노라노는 성악가 김자경 다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 한국 여성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 자신의 본명 ‘명자’를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의 이름을 따 ‘노라’로 바꾼다.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해 남편의 집을 나온 주인공에게 큰 감명을 받아서다.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는 90대인 지금까지도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반드시 하루 일곱시간씩 일한다. 마음산책 제공.

귀국 뒤 신당동 집에서 의상실을 열자마자 그의 옷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다. 연극과 영화의 무대의상 제작도 맡게 되고, 최은희, 엄앵란 등 당대 톱스타들이 줄을 서서 찾는 디자이너가 됐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유럽 연수를 다녀오고 미니스커트, 판탈롱(나팔바지) 등을 유행시키며 대중들도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전국에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노라노복장학원’ 등이 판을 치게 된 이유다. 1973년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박람회) 진출 한국 최초 디자이너, 뉴욕 쇼룸 개장에 이어 뉴욕 7번가 최고급 백화점 메이시스 1층 쇼윈도 15개가 모두 노라노의 옷으로만 진열되는 ‘기적’까지 이룬다. 부조리한 결혼생활과 이혼, 이혼녀라는 세간의 손가락질 등에 대한 분노가 “삶의 원동력”이었다는 그는, 결국 몰락한 집안의 가장으로 부모님을 부양하며 아래 7남매를 모두 공부, 결혼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젠 분노나 야망도 시간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그에겐 오로지 좋아하는 일만 남아 오늘도 아침 9시면 바늘과 시침핀을 들고 의상실에 서 있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