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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진보 남성의
기상천외한 ‘아내 만들기’

by한겨레

18세기 영국 부유한 상속자

기행 탓에 번번이 청혼 거절당하자

고아소녀 데려다 ‘완벽한 아내’로 교육

시인·인권운동가 남성의 이중성 폭로

 

진보 남성의 기상천외한 ‘아내 만들기

완벽한 아내 만들기-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웬디 무어 지음, 이진옥 옮김/글항아리·2만1000원

 

상상 속에서나 그려볼 만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현실에 나타나 나만을 사랑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바람은 상당히 근원적인 것이어서, 기원전 8세기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담은 피그말리온 신화에서부터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예술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18세기 영국에선 이런 신화를 현실로 실현시키려 위험한 시도를 한 남자가 있었다. 토머스 데이(1748~1789)는 부유한 정부 관료이자 대규모 영지를 소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난 ‘금수저’였다. 그는 일찍부터 자신이 직업을 가지고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죽어 모든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모든 변덕을 받아줘, 아들의 여성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데이는 사립기숙학교와 옥스퍼드대학을 다니면서 독특하게도 주변의 부유한 또래들이 빠져들었던 사치와 향락을 멀리했다. 대신 고대 그리스의 영웅과 특히 금욕을 중시한 스토아학파 사상,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의 유행이나 기본적인 식사 에티켓부터 모든 예절을 경멸하며, 멋대로 머리를 기르고 다니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다녔다.

진보 남성의 기상천외한 ‘아내 만들기

조지프 라이트가 그린 토머스 데이의 초상. 그는 천연두를 앓아 얽은 얼굴과 좁은 어깨로 “우스꽝스럽게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머리를 빗지도, 제대로 씻지도 않았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잘 지키지 않아 여성들에게 네번이나 청혼을 거절당한다. 이 일로 그는 한층 더 극심한 여성혐오에 빠져들게 된다. 영국 국립초상화박물관 소장

그의 여성관은 맹목적이던 어머니의 모습과 스토아 철학이 기형적으로 결합돼 당시에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나 로마의 여신처럼 젊고 아름다울 것이었다. 또한 시골 아가씨처럼 순수하고 처녀여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강하고 두려움이 없는 스파르타의 신체적 조건을 가지되 꾸임이 없고 때 묻지 않아서 옷이나 음식과 생활 습관에서도 허름한 농가의 아이처럼 수수한 취향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데이를 주인이자 선생으로, 감독자로 여겨야 했다. 그의 욕구와 변덕에 완벽하게 맞추면서 그의 사상과 신념을 완전히 따라야 했다.”

 

자신은 전혀 완벽한 남성이 아님에도 초현실적인 여성상을 고집하다가 두명의 여성으로부터 청혼을 거절당한 그는 점점 더 심한 여성 혐오에 빠져들고, 결국 자신의 기준에 맞는 여성은 세상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대신 그는 그런 아내를 직접 만들어내기로 마음먹는다.

 

21살에 후견인인 계부와 어머니의 관리 아래 있던 막대한 유산을 쓸 수 있게 된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한 시골마을의 고아원에서 각각 12살 사브리나와 11살 루크레티아(그가 지어준 이름)를 데리고 온 것. 당시에도 부도덕적이었던 이 계획은 남성연대의 도움과 묵인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독신인 데이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기혼인 친구 에지워스의 가사도우미 견습생으로 일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또 다른 친구인 런던의 잘나가는 변호사가 동행하자 고아원에선 의례적인 확인 절차도 없이 아이들을 내준다.

 

데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두 여자아이를 데리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떠나 이들에게 기초적인 학문을 가르쳤고, 동시에 모든 집안일을 떠맡도록 명령한다. 1년간의 교육과 관찰 끝에 그는 “진전이 있다는 표시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루크레티아를 버리고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느낀 사브리나를 신부 후보로 택한다. 루크레티아를 버린 뒤 사브리나에게 집중된 데이의 교육은 점점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그는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루소의 <에밀>에 큰 감동을 받고 이를 자신의 ‘아내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특히 아이들을 고통으로 단련시켜야 한다는 대목을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사브리나의 몸에 뜨거운 밀랍을 떨어뜨리고 핀으로 몸을 찔렀다. 담력을 기른다며 총을 치마에 쏘기도 하고, 사치를 혐오하도록 하기 위해 예쁜 옷을 주고는 좋아하는 소녀에게 그것들을 바로 불에 던지도록 명령한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까맣게 모르는 채로 이런 ‘교육’이 계속되자 결국 사브리나는 데이에게 반항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다행히(!) 시험에서 탈락해 기숙학교로 보내지게 된다. 만 2년에 걸친 실험이 일단 이렇게 일단락 나는 것이 책 절반까지 이야기인데, 그 뒤엔 독자들을 답답하게 또는 속시원하게 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보 남성의 기상천외한 ‘아내 만들기

1807년 G. H. 윌슨이 낸 '괴짜 거울'이란 책엔 토머스 데이가 고아 소녀를 완벽한 신붓감으로 교육하기 위해 루소의 '에밀'에 따라 교육한 내용이 나온다. 그가 소녀의 담력을 기른다며 치마에 총을 쏜 일을 그린 일러스트. '한겨레' 자료사진

데이가 단지 상류층 부자일 뿐만 아니라 당대에 이름난 시인이자 반노예제 인권운동가, 인기 아동도서 작가였다는 이중성은 독자를 불편하면서 불쾌하게 만든다. 그는 빅널과 함께 노예제를 공격한 최초의 시인 <죽어가는 검둥이>를 쓰며 일약 이름을 알리게 되고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지만, 정작 자신이 사브리나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소녀 두명을 ‘교육’했던 경험을 반영해 쓴 <샌퍼드와 머튼>이란 어린이용 책은 한 세기 동안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고, 현재도 팔리고 있다.

 

독자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의 이런 부도덕한 실험을 용인하고 방관한 주변 사람들이 18세기에 이름난 지식인들이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데이의 아내 만들기 실험을 잘 알았던 이래즈머스 다윈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면서, 조지프 라이트가 그린 유명한 그림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1768)에 나오는 초시계를 든 남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용 교육>이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을 쓴 교육사상가인 데이의 친구 에지워스가 <에밀>에 나오는 구절 그대로 아들을 교육시키는 바람에 안하무인 고집불통이 된 아들이 루소까지 기겁하게 만드는 대목은 매우 흥미로운 지성사의 한 장면이다.

진보 남성의 기상천외한 ‘아내 만들기

'완벽한 아내 만들기'의 저자 웬디 무어는 방대한 자료를 철저히 조사해 리처드 제임스 레인의 이 동판화의 주인공이 사브리나 시드니임을 밝혀냈다. 영국 국립초상화박물관 소장

영국 귀족과 의학의 역사를 다뤄온 영국 저널리스트 웬디 무어는 논픽션 <완벽한 아내 만들기>(원서는 2013년 발간)에서 데이와 사브리나의 생애를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고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이런 높은 수준의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기록의 힘이다. 200년도 넘은 고아들의 기록이 런던 메트로폴리탄 기록소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데이와 다윈과 에지워스, 유명 작가 애나 수어드 등 관련 인물들의 회고록과 편지가 보존돼 있었다. 책에는 그가 도움 받은 기록소와 도서관, 컬렉션만도 29곳에 이른다. 동시에 지은이가 250여년 전의 일을 역사적 자료에 입각해 마치 옆에서 목격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리는 어려운 과업을 기꺼이 감당한 것은, 피해자임에도 삶의 마지막까지 고통받아야 했던 한 여성을 기억하고, 남성들의 유구한 여성 혐오의 연대기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남기려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