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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불법촬영범 검거 현장,
“여자도 잘못 있네”란 말이 들려왔다

by한겨레

김영경 청년유니온 초대위원장, 불법촬영 피해자 도와 

“성범죄 원인을 피해자 탓하는 주변 반응 슬펐다”

불법촬영범 검거 현장, “여자도 잘못

서울의 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 붙은 불법촬영 주의 공고문.

서울의 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남성이 앞에 선 여성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불법촬영 하다가 주변에 있던 시민의 고발로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이 시민은 마음을 졸이며 현행범 검거를 도왔지만, 현장 인근에서 들려온 건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며 피해 여성을 탓하는 목소리였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진 이 사연에 많은 여성들이 한탄과 분노가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청년유니온 초대 위원장을 지낸 김영경(38)씨는 21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몰카(불법촬영) 현행범을 잡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김씨는 2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일 밤 9시40분께 서울지하철 연신내역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남성이 앞에 선 여성을 불법촬영 하고 있는 걸 목격해 가해자를 잡게 됐다”며 “그동안 여성들의 불법촬영 범죄 피해가 흔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 주변에서 이런 일을 접하게 돼 너무 당황스럽고 우려되는 마음에 글을 남기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김씨의 페이스북 글 전문은 아래와 같다.

김영경 씨 페이스북 글 전문


슬프게도… 좀 전에 몰카 현행범을 잡았다…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서 남긴다 .

귀갓길 . 지하철역에 내려서 우리 집 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

내 앞에 남자 , 그 앞에 치마를 입은 여자가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

무심히 앞을 봤는데 아무래도 남자의 손짓이 이상했다 .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확인하고 다시 내밀었다가 확인하고 . 세 , 네 차례 반복하였다 .

이상해서 관찰하였는데 처음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장난을 치는 건가 했다 .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정상에 오르자 여자분은 반대 방향으로 갔고 그 남자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사람의 가방을 잡으며

지금 뭐 하신 거세요 ? 라고 물었다 .

그러자 그 사람이 내 손을 뿌리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

너무 빨라서 역부족이었다 .

계속 쫓아가면서 , 잡아주세요 ! 제발 잡아주세요 ! 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

하지만 그 사람이 너무 빨라서 몇 분의 남자들이 시도했지만 잘 잡지 못했다 .

그러다 그 사람보다 덩치 큰 남자분이 잡으려고 시도했고, 불리하다고 느꼈는지 그 사람은 신호가 걸려 차가 정지한 도로로 뛰어들어 맞은편으로 달렸다 .

순간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이 개새끼야를 외쳤다 , 정말 억울했다…

근데 그 맞은편은 버스 정류장이었고 다행히도 사람들이 많았다 . 남자 두 분이 뛰어와 주었고 그 사람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다시 방향을 트는 와중에 그 남자들에게 잡혔다 .

쫓아가서 그 사람 핸드폰을 뺏어야 한다고 거의 울부짖었다 . 그 사람을 잡은 한 남자분이 핸드폰을 뺏어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

내가 경찰서에 신고 좀 해 주세요 라고 외쳤는데

옆에 있던 여자분이 자기가 신고하겠단다 .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 바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

그분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큰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몰리자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다 .

다급한 마음에 그분에게 가서

방금 저 출구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맞다고 했다 . 그래서 당신이 찍힌 것 같다고 , 제가 목격자라고 했더니 그분이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

그때 옆에 서 있던 다른 여자분이 자기가 신고했다며 곧 경찰이 온다고 했다 .

조금 있다 경찰이 왔고 현행범을 먼저 데리고 갔다 .

다른 경찰차를 타고 혼자 이동해야 할 그 피해자가 안쓰러워 가보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

경찰에 신고한 분이 피해자 어깨를 도닥이고 있길래

친구세요 ? 라고 하니 아뇨 , 모르는 분이에요 한다 .

근데 그 사람도 이미 울고 있었다 .

그 순간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대화를 하지도 않았는데 생면부지의 그 여성분은 함께 울고 있었다 .

좀 있다 피해자를 태울 경찰차가 왔고 , 신고한 분과 나는 응원을 하며 그녀가 차를 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

그렇게 수습이 되고 돌아서는데 역 앞 포장마차 아저씨가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

여자도 잘못이 있네 .

기진맥진해서 그냥 돌아서는데 서러웠다 .

다음에 저 집에 꼭 오뎅 먹으러 가서 아저씨랑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독한 마음도 먹었다 .

하지만 걸어가는데 온몸이 떨렸고 그제야 공포가 밀려왔다 .

그 찰나에 , 온 세상이 미웠다 .

그럼에도 그 범인을 잡아준 사람들도 남성들이고 ,

피해자가 경찰차를 타고 가야 할 때 경찰에게 지인이 없어서 혼자 가야 하는 데 불안하지 않겠냐며 끝까지 있어 준 사람들 중에는 남성들도 있었다 .

그 사람이 미울지언정 모든 사회 , 모든 사람 , 특정 성별을 온전히 미워하지 말자고 계속 심호흡 중이다 .

돌아오는 길에 , 귀신처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

진정이 되지 않아 부러 받지 않았다 .

언제면 이 서러운 마음들이 가실 수 있을까 ?

김씨의 설명을 더하자면, 당시 사건 현장은 밤 10시를 앞둔 늦은 시간이었지만 역 안의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김씨는 “주변이 낮처럼 환하고 피해자와 같은 여성인 내가 바로 (가해 남성) 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불법촬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매우 놀라웠다. 가해자는 불법촬영을 범죄가 아닌 한낱 장난 정도로 여기는 듯 보였다”고 전했다.

 

이날 김씨는 사건 현장 주변에 있던 시민들의 도움으로 달아나는 불법촬영 가해자를 잡아 경찰에 넘겼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가해 남성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보관했던 김씨는 비밀번호 설정 때문에 불법촬영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 발생 2시간 뒤 경찰로부터 ‘남성의 휴대전화에 피해자를 불법촬영 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불법촬영범 검거 현장, “여자도 잘못

23일 서울 지하철 연신내역 내부 에스컬레이터 모습. 이재훈 기자

김씨는 글에서 현행범 검거 현장을 목격한 역 주변 포장마차 주인이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며 피해자를 탓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걸 들었다고 언급한 것과 관련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풀렸다”며 “피해자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길이의 헐렁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불법촬영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말에 같은 여성으로서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불법촬영은 심각한 범죄인 만큼 경찰 신고를 요청하고 피해자를 도왔는데 현장에서 (포장마차 주인처럼)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며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가운 시선, 나 자신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쩌면 나와 가해자, 피해자 모두 한 동네 사람일 텐데, 대부분의 불법촬영 사건이 그렇듯이 벌금만 내고 풀려나올 가해자가 나와 피해자의 얼굴을 기억하면 어쩌나, 나중에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며 걱정을 호소했다.

 

김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게재 이틀 만인 23일 오전 8시 현재 모두 1600여개의 ‘좋아요’와 ‘화나요’ 등의 공감 반응을 얻었다. 이 글을 본 여성들은 댓글에서 “피해자 잘못 하나도 없어요. 뭐가 여자가 잘못이 있나요. 오늘도 비참하네요” “포장마차 주인 (반응이) 진짜 현실인 것 같다. 갈 길이 멀다” “(과거 불법촬영 피해자로서) 지금도 누가 휴대전화만 들면 날 찍는 것 같아서 대중교통에서 내릴 때 그 사람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고 내리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아직도 그 화면에 갇혀 산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