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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의료인 ‘희생’ 당연시하는 병원…안 바뀌네, 공짜 초과노동

by한겨레

76.5%가 하루 평균 76~98분 연장근무

대부분이 수당 ‘0원’ 또는 일부만 받아

퇴근 뒤 응급환자 생기면 ‘콜 근무’도 예사

간호사들 “바쁠 때는 생리대도 못 갈아요”

보건의료노조 6월부터 병원 73곳과 교섭중

의료인 ‘희생’ 당연시하는 병원…안

지난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의료센터.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김밥을 사들고 걸어가던 간호사가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병원 복도에서 만난 의사를 지나치며 몇마디를 남긴다. “대동맥 박리(대동맥 혈관벽이 찢어져 발생하는 질환) 환자예요. 대전에서 수술받았는데 또 쓰러졌대요.” 응급실로 향하던 길에 김밥을 떨어뜨리고도 간호사는 바쁜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저녁 식사는 또 그렇게 멀어졌다.

 

국내 메디컬 드라마 <라이프>의 한 장면이다. 병원 노동자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병원을 포함하는 보건업은 노사가 서면으로 합의하면, 무제한 연장근로가 가능한 근로시간 특례업종의 하나다. 게다가 노동조합이 없거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한테는 ‘노사가 합의하면’이라는 조건마저도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병원 노동자한테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봤다.

매일 공짜노동…의료인 희생 당연해?

“바쁠 때는 생리대도 못 갈아요.”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심지윤(가명) 간호사는 수술실 담당이다. 아침 7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심씨의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지켜지면 법정 노동시간을 어길 리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먼저 심씨는 매일 1시간씩 일찍 출근해 수술을 준비한다. 이따금 수술이 기약 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한밤중 응급수술이 생겨 호출을 받는 일도 이따금 있는데, 수당을 다 받지는 못한다. 심씨는 “병원이 ‘(간호사의) 역량 부족’ 운운하며 수술 준비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새벽 응급수술의 경우 간호사가 자발적으로 나온 거라며 수당 지급을 꺼린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3월부터 두달 동안 조합원 2만9천여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6.5%가 하루 평균 76~98분의 연장근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79.5%는 연장노동 수당을 못 받거나 일부만 받고 있다. 특히 간호직은 그 비율(90.7%)이 여러 직군 가운데 가장 높았다. 심씨는 “병원에 의료인의 장시간 노동을 당연히 여기는 듯한 분위기가 많아 주 52시간을 지키자고 선뜻 말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의료인 ‘희생’ 당연시하는 병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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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응급호출에 응급노동으로 대응

경북대병원 혈관촬영실 방사선사 김민수(38)씨는 지난주 두번이나 퇴근한 뒤 다시 병원에 불려 갔다. 응급환자 때문이다. 하루는 새벽 1시30분, 다른 하루는 새벽 3시30분이 되어서야 퇴근했다. 예기치 않은 새벽근무에 거의 매일 연장근무까지 이어져 김씨는 지난주 63시간 넘게 일했다. 주 52시간을 기준으로 할 때, 법정 노동시간을 11시간이나 넘긴 것이다.

 

병원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불만은 근무시간이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상당수 종합병원은 새벽에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퇴근한 간호사·방사선사·임상병리사한테 에스오에스(SOS) 신호를 보낸다. 이게 바로 ‘콜 근무’라는 것이다. 병원 인력이 부족한 탓에 콜 근무를 했다 하더라도, 아침에는 어김없이 ‘정시 출근’이다.

 

콜 근무는 병원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거의 무제한으로 늘리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김씨는 “응급환자가 없다면야 법정 노동시간을 지킬 수 있겠지만, 언제 응급환자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콜 근무를 폐지하고 인력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밤중 급하게 혈관촬영실을 찾는 환자는 뇌경색이나 뇌출혈이 많다. 김씨는 ‘골든타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호출을 받으면 30분 안에 출동하려 한다. 김씨가 휴대전화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잘 때도 놓지 못하는 이유다. “벌써 이런 생활이 10년째라 단잠 깨는 일이 익숙하다”는 김씨도 새벽 근무는 힘에 부친다.

 

김씨는 4년 전 동료 방사선사가 새벽 근무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교대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병원은 인력 충원에 소극적이다. 김영희 공공운수노조 경북대병원 분회장은 “병원은 법 위반만 피하겠다는 태도라 사실상 ‘일과 생활의 균형’을 추구하려던 주 52시간 근무제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고 말했다.

교대제 퍼즐 맞춰 법 위반 면하기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맞춰 교대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를 꾀한 병원에서도 볼멘소리는 나왔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법 위반만 모면한다는 식으로 근무 패턴을 조정했기 때문이다. 강원대병원에서 환자 이송을 담당하는 간호조무사 김덕중(39)씨는 지난 6월까지 격일로 야간에 15시간씩 일하다가 지난 7월1일부터는 오전·오후·야간 3교대로 일하고 있다.

 

교대제 개편으로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문제는 남았다. 김씨는 “이전보다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딱 필요한 인력만 뽑아 근무표를 만들다 보니 일정이 굉장히 빡빡하다”고 말했다. 병가나 연차휴가 등으로 결원이 생기면 병원 편의에 따라 근무표가 조정되는데 이때 남은 근무자가 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강원대병원 노사는 단체협약으로 ‘근무와 근무 사이 휴식시간을 16시간 이상이 되도록 한다’고 정하고 있지만 인력 부족 탓에 이를 못 지키는 경우도 생긴다.

 

보건의료노조는 주 52시간 근무제 준수를 위해 지난 6월부터 병원 73곳과 교섭을 진행했으나 인력 문제 등에서 접점을 찾지 못해 쟁의조정 신청을 낸 바 있다. 조정 과정에서 한양대의료원은 150여명, 고대의료원은 정규직 75명, 원자력의학원은 52명 증원 계획을 내놓았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