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살인마 vs 집념의 형사, 관객 볼모삼아 ‘110분 밀당’

[컬처]by 한겨레

[리뷰] 영화 ‘암수살인’


피 튀기는 잔인함·추격전도 없이

두뇌싸움만으로 긴장감 극대화

왜 자백했을까? 왜 추적하는가?

결론보다 과정에 관객들 몰입

5년간 공들인 취재와

탄탄한 연기력 버무려져

새로운 한국형 범죄 드라마

광기의 살인마 vs 집념의 형사, 관

올 추석 극장가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100억~200억대의 대작인 <안시성>, <명당>, <협상> 등에 제임스 완의 ‘컨저링 유니버스’ 신작 <더 넌>까지 가세해 혈투를 벌였다. 이에 견줘 추석 전쟁에서 한 발 비켜 개봉하는 영화들은 개천절(10월3일)과 한글날(10월9일) 휴일을 끼고 영리하게 틈새시장 공략에 나선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주지훈·김윤석 주연의 실화 기반 영화 <암수살인>(10월3일 개봉)이다. 이제는 ‘대세’로 자리를 굳힌 주지훈의 연기 변신과 ‘믿고 보는 배우’ 김윤석의 안정된 연기가 러닝타임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함 없이도, 쫓고 쫓기는 무리한 추격전 없이도, 퍼즐 같은 단서와 두뇌 싸움만으로 관객을 110분 동안 오롯이 스크린 안에 가둬둔다.

광기의 살인마 vs 집념의 형사, 관

수감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는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추가 살인’이 있었음을 자백한다. “내가 죽인 건 한 명이 아니라 7명”이라는 믿기 힘든 내용이다. 형사의 직감으로 자백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 형민은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단서로 수사에 돌입한다. 태오의 살인은 범인은 있지만 신고도, 사체도, 수사도 없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건들이다. 형민은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뒤섞인 리스트의 진위를 추적하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동료 경찰은 “미쳤다”며 등을 돌리고, “실적은 없고 사고만 친다”는 이유로 강등돼 파출소 근무 신세에 몰린다. 하지만 그의 집념과 끈기, 소명은 포기를 모른다.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암수살인’이란 용어는 실제 범죄는 발생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인지됐다 하더라도 용의자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공식적인 범죄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 ‘암수범죄’에서 비롯된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생소한 소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영화 <암수살인>은 범인이 누구인지, 시작부터 밑천을 다 드러내놓고 시작한다. 사건은 범인이 감옥에 갇히면서 그 실타래의 끝을 내보이고, 형사는 오직 범인이 내어놓은 밑도 끝도 없는 진술에서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살인의 추억>처럼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다니거나, <추격자>처럼 관객은 알지만 형사만 모르는 범인의 그림자를 쫓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고 영리한 범인이 빵부스러기를 흘리며 형사를 유인해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다.

광기의 살인마 vs 집념의 형사, 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대체 왜 범인인 태오는 살인을 자백하는가’, ‘형사 형민은 살인범의 농간에 놀아나는 줄 알면서도 왜 시간과 돈을 들여 사건을 추적하는가’. 범인과 형사의 치열한 심리전,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기 힘든 두뇌 싸움에 합류한 관객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는 새로운 한국형 범죄드라마와 만나게 된다. 영화는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송됐던 에피소드에서 시작됐다. 방송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김태균 감독이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가 실제 주인공인 형사를 만나 5년 넘게 끈질긴 취재와 꼼꼼한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사 기록을 전혀 엉킴 없이 풀어낸 감독의 실력이 놀랍다.

광기의 살인마 vs 집념의 형사, 관

누구보다 칭찬받아야 할 사람은 배우 주지훈이다. 올해 <신과함께-인과 연>, <공작>을 통해 관객을 사로잡은 주지훈은 <암수살인>을 통해 사이코패스적인 살인마 강태오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강렬한 악센트를 잘 살린 부산 사투리와 삭발, 광기 번뜩이는 야수의 눈매, 시시각각 폭발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내면 연기를 통해 통제 불가능한 살인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주지훈의 뒤를 받쳐주며 마치 게임을 하듯 합을 맞추는 김윤석의 연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화 속 형사 형민은 승부를 걸어오는 태오에게 말한다. “너 같은 놈을 내가 이겨 뭐 하냐? 그냥 두면 형사인 것이 쪽팔리니까 그러지”라고. 인위적인 양념 없이도 <암수살인>이 묵직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는 바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한 형사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집념 때문이다. 형사라는 직업에 기대하는 유일한, 그러나 요즘엔 보기 드문 이런 열정이 관객을 매료시킨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2018.10.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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