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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도전,
대극장 객석을 당당히 홀리다

by한겨레

그의 등장

장애-비장애 캐스팅 장벽 허물고

‘바넘, 위대한 쇼맨’ 톰 섬 장군으로

눈에 띄는 건 키 아닌 연기력

 

도전, 그리고 성장

관객이 불편해할까 조심했지만

“등장 그 자체가 감동” 호평 넘쳐나

“SNS 친구 100명이나 늘었어요.”

 

편견을 깼다

전세계 성·장애·인종 차별 허물기

“배우로서 배역 제약 많이 받지만

미드 ‘왕좌의 게임’에 출연한

피터 딩클리지 보고 용기 얻었다”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도전, 대극장

뮤지컬 '바넘, 위대한 도전'에서 톰 섬 장군으로 열연하는 배우 김유남이 대한민국 문화계를 바꾸는 작지만 큰 걸음을 내디뎠다. 장애를 가진 배우가 상업적인 큰 공연에서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11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자신감 넘치고, 유쾌한, 긍정적인 성격이 천상 배우였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머릿속에서 한참 말을 골랐다.


“다 같은 배우인데, 조금 작은 신체 때문에, 그저 키가 작은 것뿐인데, 근데 현실에서 그런 시선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받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애, 왜소증 등의 표현을 피하려다 질문이 빙빙 겉돌자 그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그냥 ‘왜소증이라서 차별받은 적은 없어요?’라고 물어도 괜찮아요. (웃음) 차별받을 수밖에 없죠. 난 멋진 로맨틱 코미디 남자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키 맞는 여성분이 있겠어요? 그리고 조금 작은 게 아니라 아주 작죠. 난쟁이! 하하.”


아, 그러니까! 이런 어쭙잖은 배려가 또 다른 차별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마주 앉으면 말을 뱅뱅 돌리게 된다. “비장애인들은 그걸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배려하면 오히려 더 불편해요. 시선 자체가 너와 내가 다르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 쿨한 남자가 바로 요즘 공연계에서 화두에 오른 132cm 저신장 배우 김유남(25)이다.

무대 위 존재 자체가 ‘사건’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도전, 대극장

뮤지컬 '바넘, 위대한 쇼맨'에서 김유남은 에너지 넘치는 공연을 선보인다. 킹스아이컴퍼니 제공

그는 배우로서 대한민국 문화판에 작지만 큰 선을 긋고 있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바넘, 위대한 쇼맨>에서 ‘톰 섬 장군’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 <바넘, 위대한 쇼맨>은 쇼 비즈니스 창시자이자, 쇼맨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은 남자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의 일대기를 그린다. 장애인들을 상업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도 있는 바넘을 너무 좋은 사람으로만 그린다는 우려도 나오지만, 흔히 장애인-비장애인 공연으로 나누던 무대 벽을 허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 공연계에서 특정한 장애를 가진 배우가 대극장에서 일반 배우들과 어우러지며 극을 끌어가기는 처음이다. 박주희 공연평론가는 “대중성을 지향하는 상업적인 뮤지컬에서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박수받아야 할 시도”라고 평했다.


물론, 극중 ‘톰 섬 장군’도 왜소증 캐릭터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역할에 실제 왜소증 배우를 캐스팅한 경우가 드물다. 국외에서 1980년 초연한 <위대한 쇼맨>에서는 150~160cm 정도의 키 작은 배우가 맡았고, 2017년 영국 런던 공연에서도 평균 남자들보다 작은 키의 배우가 연기했다. 제작사인 킹스아이컴퍼니 쪽은 “모든 작품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대부분 키가 작은 배우가 왜소증 캐릭터를 맡아왔다”고 말했다. 한국의 톰 섬 장군 역시 그저 키 작은 배우가 맡아도 됐을 것이다.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도전, 대극장

뮤지컬 '바넘, 위대한 쇼맨'. 킹스아이컴퍼니 제공

김유남을 톰 섬 장군으로 대극장에 세운 것 자체만으로도 큰 변화다. 전세계적으로 이런 움직임은 조금씩 일고 있다. 캐릭터의 남녀 성별을 허무는 ‘성 중립 캐스팅’과 함께, 장애·인종 차별을 깨려는 움직임도 잦아지고 있다. 2015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에서는 흑인 배우 노마 드메즈웨니가 헤르미온느 역을 맡았다. ‘해리 포터 시리즈’ 역사상 흑인이 헤르미온느 역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소설 삽화와 영화에서도 백인이었다. 지난해 4월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에서 선보인 연극 <뜻대로 하세요>에서는 주인공 중 한명인 셀리아 역을 청각 장애 배우 나디아 나다라자가 연기했다. 수화는 두 주인공만의 특별한 소통방식으로 그려졌다.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성 중립 캐스팅을 시도했던 김태형 연출은 “2015년 영국 연극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백인 아들의 아빠를 흑인으로 캐스팅하는 등 인종 구분 자체를 없앤 점이 놀라웠다”며 “한국에서도 편견을 깨는 시도를 해보고 싶었지만, 대중성을 지향하는 작품에서는 사실 쉽지 않다. 성 중립은 작은 첫걸음이었다”고 말했다.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출연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 공연계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긴 셈이다.


8월7일 막을 올린 뒤 2달 남짓. 김유남 배우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관객 반응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무대에 설수록 관객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껴요. 처음에는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불편해할까 봐 밖에서 만나도 다가서지 못했는데, 관람 후기에 좋은 이야기가 많은 걸 보고, ‘톰 섬 배우 아니야?’ 라는 소리가 들리면 먼저 가서 사진도 찍고 해요.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100명이나 늘었어요. 기대보다는 적지만. 제가 ‘관종’이거든요. 하하하.” 실제로 공연 후기에는 “모르고 왔는데, 이 배우의 등장 자체가 감동이다”는 평가가 많다. 배우를 배우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는 것만으로도 김유남은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2012년 왜소증 친구가 개그맨 공채 시험을 봤는데, 심사위원들이 ‘너무 재미있지만 아직 너를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사회가 부족하다’면서 떨어뜨렸다더라고요. 그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나도 피터 딩클리지처럼!”

왜소증 배우 김유남의 도전, 대극장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래니스터 역으로 에미상을 거머쥔 피터 딩클리지. 그는 장애가 있는 배우들도 멋진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며 배역의 장벽을 깼다. 한겨레 자료사진

관객들이 톰 섬 장군에 감동하는 건 그저 장애를 딛고 일어난 배우의 분투라서가 아니다. 등장 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관객을 극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연극 <언더 그라운드>에서 그의 연기를 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이번 작품에 캐스팅됐다. 그에게 장애는 부족한 연기력의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그는 극중에서 세상과 담 쌓고 살았던 톰 섬 장군을 표현하는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흔히들 “경험해봤으니 그 마음을 잘 알지 않겠어?”라고 말하기 쉽지만, 그는 반대다. “왜 자신을 가두고 살지? 난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그는 연극영화코미디학과를 졸업한 뒤 연극으로 데뷔했다. 고등학교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을 정도로 사교적이고 활발하다. 그는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키웠다”며 웃었다. 그처럼 왜소증을 가진 그의 어머니 역시 씩씩하다고 했다.


키 제약 때문에 다양한 역할에 도전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다. 지금껏 무용과 연극, 뮤지컬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지만, 주로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많았다. 지난해 안은미 무용가와 함께 <대심(大心)땐스>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그 역시 장애와 비장애가 어우러지는 게 콘셉트였다. <바넘, 위대한 쇼맨>은 ‘장애’를 부각하지 않고 배우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 첫 작품일 수 있다. 그는 “지금껏, 운 좋게 왜소증으로 ‘틈새시장’을 노려서(웃음)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아 꾸준히 출연해왔는데, 앞으로 다양한 것에 도전해봐야겠다”며 웃었다. 그는 “러브신 있는 로맨틱한 남자, 흥청망청 노는 <왕자의 게임>의 티리온 같은 남자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안다. 쉽지 않다는 걸. <찰리와 초콜릿공장> 딥 로이, <오스틴 파워> 번 트로이어 등도 연기력이 뛰어났지만 작은 키 때문에 배역에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2011년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래니스터’로 나온 피터 딩클리지가 그 한계를 깼다. 그는 극중에서도 왜소증으로 놀림받는 왕자이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와 정치감각으로 인기 캐릭터로 떠올랐다. 2012년 에미상 남우조연상도 받았다. 시청자들은 냉소와 우수가 깃든 그의 근사하고 다양한 표정에 반해 ‘섹시한 남자’로 꼽길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2016년 미국 차기 대통령 후보 온라인 설문 조사’ 1위에 꼽히는 ‘영광’도 누렸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그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거나, 사랑을 할 수 없다거나, 장애인만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김유남은 “피터 딩클리지의 그 섹시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눈에서 나오는 그 에너지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도 살만 조금 빼면 가능합니다!”


<바넘, 위대한 쇼맨> 막바지에 톰 섬 장군의 외침은 그의 외침이기도 하다. “바넘이 찾아오기 전까지 전 작은 의자에 파묻힌 난쟁이 똥자루에 불과했죠. 90cm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나 같은 사람도 이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그런데 어때요. 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말하고 있어요.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고, 내게 장군 칭호를 주고 용기를 심어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바넘이에요.” 김유남도, <바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원래 멋지긴 했지만, 바넘으로 더 멋져진 건 맞죠! 하하하.”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