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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와인처럼…나무가 수백년 숙성시킨 명품악기의 울림

by한겨레

‘명품 바이올린’ 소리의 비결

와인처럼…나무가 수백년 숙성시킨 명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음악가는 악기를 가린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이탈리아 명품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니에리 두 개를 다 소장하고 있다. ‘불의 바이올리니스트’ 로랑 코르시에, ‘얼음여왕’ 빅토리야 물로바 등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한다. 300년 가까이 된 이 악기들은 경매에서 재테크 수단으로 주목받을 만큼 희소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심오한 울림을 간직할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와인처럼…나무가 수백년 숙성시킨 명품

경호원 감시 속에서 연주했던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는 파가니니는 과르니에리 델 제수(1743년산)를 켰다. 과르니에리 중에서도 델 제수는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니에리(1698~1744)가 만든 악기를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120여대뿐이 없는 희귀한 악기로 파가니니가 쓴 과르니에리는 현재 스위스 제네바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2015) 한국인 최초 우승자인 양인모는 우승자에게 주는 특전으로 실제 파가니니가 사용한 이 악기를 연주해봤다. 양인모는 <한겨레>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그날의 특별한 경험을 들려줬다. “경호원 4명의 보호 아래 4시간 연습한 후 공연을 했어요. 무대에 올라갈 때도 전 활만 들고 나갔고 경호원이 악기를 건네줬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경호원이 무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더라고요.(웃음)”


파가니니가 쓴 악기를 직접 연주해보는 건 무척 떨리고 신나는 일이었다. 양인모는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그런 길들여진 소리가 났다”면서 “이렇게 좋은 악기를 연주해 본 건 처음인데 ‘캐논’(대포)이란 별명을 가진 악기답게 소리가 크고 음색이 다양했다”고 말했다.


과르니에리와 함께 대표적인 명품 악기로 꼽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작품이다. 첼로, 바이올린 등 1000대가 넘는 악기를 제작했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연주 가능한 상태의 바이올린은 50여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품 악기를 만드는 건 좋은 재료

소리 비결로 가장 많이 나온 분석은 기후와 관련된 것이다. 미국 테네시대학의 학자들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된 당시의 기후가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악기가 만들어진 16~17세기 나뭇결의 밀도가 높고 나이테가 촘촘하다는 것이 섬세한 소리를 내는 비결로 꼽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니에리 등 명품악기가 탄생한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13년째 현악기 제조를 하고 있는 이승진 제작자는 “과학자들이나 악기 제작자들도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이들 악기의 소리 비결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면서 “기후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악기의 소리는 재료나 제작방식 등 여러가지 면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현악기 제작자들이 명품 악기를 만드는 비결로 꼽는 건 좋은 재료다. 바이올린 앞판은 부드러운 가문비나무로, 뒷판과 옆판·머리부분은 강한 단풍나무로 만든다. 독일에서 현악기 제작을 공부하고 온 스트라디 현악기 공방의 김동인 대표는 “나무는 같은 종류라도 깎아보면 질량이나 성질이 다른 비정형화된 재료”라면서 “한 사람이 만들어도 악기마다 소리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제작자의 주관적인 경험치가 들어가야 수준 있는 악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과르니에리·스트라디바리우스…

수백년 지나도록 심오한 울림 지닌

연주자들조차 접하기 힘든 명품들


가문비·단풍나무 등 재료가 첫째

제작 당시 기후가 섬세한 소리 좌우

도료 배합 비법도 중요한 영향


강철·은·알루미늄 쓴 강한 줄에

정확한 표현 담아낼 활 소재 중요

무엇보다 연주자와의 궁합이 필수


온·습도 유지는 물론 점검·보수까지

만듦새보다 중요한 건 철저한 관리

애호가들 재테크 수단으로도 각광


칠(도료)도 중요하다. 칠은 온도나 습도의 변화를 보호해주고 방수 효과도 갖는다. 이승진 제작자는 “베이스 칠을 만들려면 천연 송진, 열매 진액, 곤충 진딧물로 만든 락카 등을 섞어서 사용한다”면서 “각 재료마다 탄성, 내구성, 물성이 다 다른데 이를 어떻게 배합해 바르냐가 제작자의 비법이 된다”고 했다.


현악기의 줄과 활도 악기 본체만큼이나 연주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바이올린 줄은 강철에 은, 알루미늄 등을 감아 코팅한 현을 사용한다. 20년 넘게 정경화·정명화(첼리스트)의 악기를 관리하고 있는 유제세현악실 유제세 대표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줄마저 부드러우면 소리가 뻗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악기는 강한 줄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활은 브라질산 나무와 몽골 말의 말총이 주로 쓰인다. 프랑스에서 1800~1900년대 중반 주로 제작된 사르토리 활은 활 중의 명품으로 평가받는데 현대적이면서도 다양한 연주 기법에서 두루 정확한 표현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시회, 경매장마다 악기 구매자들 발길 연주용인 희귀한 좋은 악기는 몸값이 수백억대까지 나가는 만큼 개인 소장보다는 문화재단이나 기업에서 대여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1993년부터 악기은행을 운영하며 유망주에게 악기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도 2011년에 명품악기인 과다니니 투린(1774년산)을 대여받았는데 이 악기는 이전에 클라라 주미강도 사용했었다. 하지만 비싸고 좋은 악기도 연주자와 궁합이 맞아야 한다. 금호악기은행의 악기를 관리하는 김동인 대표는 “두 사람에게 잘 맞았던 과다니니 투린을 (고인이 된) 권혁주는 원하는 소리를 내는데 1년을 고생해야 했다”면서 “연주자에겐 자신에게 맞는 악기를 찾는 것이 큰 고민”이라고 말했다.


명품 악기는 아니어도 제대로 소리를 내는 검증된 악기를 구하려는 연주자들은 해외로 직접 나가거나 경매를 이용해 구입한다. 미술품 경매사인 케이옥션은 연주자나 클래식 악기 애호가들의 수요를 파악하고 지난 3월부터 악기 경매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악기 경매로 시작했으나 재테크용보다 실제 연주 목적으로 구입하는 이들이 많아 현대악기를 더 많이 소개하고 있다. 악기는 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매 13일 전부터 전시를 하고 직접 실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껏 국내서 가장 비싼 낙찰가를 올린 악기는 유진 사르토리 첼로 활로 6300만원에 낙찰됐다. 케이옥션 관계자는 “군소악기상과의 거래는 발품이 필요하고, 대여악기는 재능 있는 연주자들 위주로 돌아가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없다 보니 제작정보와 가격이 투명한 경매를 통해 악기를 구입하려는 연주자나 클래식 애호가가 많다”고 말했다.

와인처럼…나무가 수백년 숙성시킨 명품

악기 전시회를 통해 악기를 구매하는 이들도 많다. 1996년에 창립된 크레모나 바이올린 컨소시엄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국내 악기수입상인 송우와 함께 2009년부터 서울에서 꾸준히 현악기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대구에서도 전시를 가졌다. 송우 관계자는 “크레모나에서 활동하는 장인들이 직접 악기 점검도 해주고 악기 시연회도 연다”면서 “지방에서도 관심이 많아 접근성이 좋은 대구에서 열어봤는데 구매 문의가 많았다”고 전했다.


■ 만듦새만큼 관리도 중요 명품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관리를 잘해서이기도 하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었다고 해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악기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온·습도 관리는 기본이고, 사용량이 많으면 악기도 몸살이 날 수 있기 때문에 3~4개월에 한 번씩은 정기적인 점검을 받아야 한다. 유제세 대표는 “정경화 선생님은 녹음이나 연주회를 앞두면 일주일에 두 번도 찾아오신다”면서 “그만큼 악기가 예민하고, 연주장소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동인 대표도 “15년 전쯤 독일 첼리스트인 율리우스 베르거가 내한했는데 그 사람 악기가 500년 된 아마티 제품이었다”면서 “잘 만들어진 악기는 적절한 복원과 수리를 병행하며 관리하면 몇백년이 지나도 싱싱하고 건강한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승님처럼…오래도록 내 악기 성장 지켜보고 싶어요”


이승진 현악기 제작자 인터뷰

와인처럼…나무가 수백년 숙성시킨 명품

지난해 겨울에 사라 장(바이올리니스트)이 제가 만든 바이올린을 소리가 좋고 잡음이 없다며 칭찬해주더라고요. 소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그 악기를 올해 ‘슬로바키아 아르벤시스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 출품해 상(2위)을 받았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크레모나에서 이승진(39)씨는 13년째 현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요리 유학을 갔다가 취미로 배운 악기 제작에 빠져 직업을 바꾼 그는 크레모나의 스트라디바리 국제현악기제작학교를 졸업하고 3대째 현악기를 제조하는 모라시 공방에서 일을 배웠다. 1대 장인인 지오 바티 모라시에게 기술을 전수 받고 5년 만에 독립해 현재는 자신의 개인 공방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1위(2013) 등 국제 대회에서 10여회 수상을 한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달 26일 전시회가 열린 서울 종로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현악기 제작자는 경력이 20년은 넘어야 존중받는데 황금기인 50대를 기다리며 잘 버티고 있다”면서 웃었다.


그가 사는 크레모나는 수백 년 전부터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니에리 같은 거장들의 계보를 이어받은 공방들이 약 120개 넘게 운영 중이다. 정육점, 서점 등 가게마다 바이올린이 하나씩 놓여 있는 이곳에서 그는 크레모나의 전통방식에 따라 최소 10년 이상 햇빛과 그늘에 건조한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로 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혼자서 하루 8시간씩 꼬박 일한다 치면 1년에 8~10대의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어요. 이번 전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스승의 모델을 따서 만든 비올라에요. 지난 2월 별세하셔서 가슴이 아프네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악기의 최적 소리를 찾기 위해 의지하는 건 아내다. 현재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 중인 아내 강운영 바이올리니스트는 그가 악기를 만들 때마다 단원들에게 가져가 평가를 전달해준다. 사라 장과의 만남도 아내 덕분에 이뤄졌다.


그는 “이탈리아 악기 특징이 고음에서 깨끗하고 밝게 뻗어 나가는 음색을 가졌는데 제 악기의 특징이기도 하다”면서 “한국에선 새 악기가 소리가 잘 안 날 것이란 선입견이 강한데 옛날보다 기술의 진보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좋은 소리를 내는 건강한 새 악기도 많아지고 있으니 편견이 사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전수돼온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그도 자신의 손을 떠난 악기를 오랫동안 보고 싶은 바람이다. “모라시 공방에서 일할 때 30대 연주자가 스승님을 찾아와 20년 전 사간 악기로 음반도 내고 오케스트라 단원도 됐다며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제 악기가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장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소리를 내는 걸 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고요.”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