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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반세기 전 ‘우리 결혼했어요’ 광고냈던 그 열정 지금도”

by한겨레

[짬] ‘오름 나그네’ 김종철의 부인 김순이 시인

한겨레

유난히 하늘이 청명했던 지난 15일, 제주 한라산의 최고봉 백록담 남벽이 한 눈에 바라다보이는 선작지왓의 탑궤(바위그늘)에서는 책을 헌정하는 아주 특별한 의식이 진행됐다.


“선생님, <오름나그네> 개정판을 가져왔어요. 25년 만이니 너무 오래 걸렸지요? 말씀하신대로 교정이 잘 됐는지 한번 살펴봐주세요.”


바위 틈새에 연두·파랑·빨강 표지의 3권짜리 <오름나그네-제주의 영혼, 오름을 거닐다>(도서출판 다빈치)를 펼쳐놓고 어제본 듯 대화를 나누는 이는 저자인 고 김종철 선생의 부인 김순이(73) 시인이다.


언론인이자 산사람이었던 김종철은 지난 1995년초 세상을 떠나 소원대로 선작지왓에 뿌려져 한라산의 바람이 됐다. ‘오름나그네’ 초판을 낸 지 20일 만인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오류’와 ‘오타’를 걱정하는 남편에게 “내가 책임지고 고치겠다”고 했던 약속을 아내가 마침내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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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탑궤에서 바라보는 윗세오름과 백록담을 워낙 좋아했어요. 특히 선작지왓에 진분홍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만발할 때나 하얀 설원이 펼쳐질 때면 꼭 데려와 보여주곤 했지요. 그런데 워낙 탐방로가 없는 곳인데다 나이가 들어 관절염으로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다보니 오랫동안 기일에 인사도 못했어요.”


이날 특별히 한라산국립공원 쪽의 승인을 받아 어리목에서 윗세오름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올 수 있었던 김 시인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연배로 모노레일에 동승한 고길홍 사진작가는 김종철의 장례식 때 이후 처음으로 탑궤를 찾았다고 했다. 단짝처럼 붙어다녔던 ‘오름 나그네’가 떠난 이후 아예 한라산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는 그는 이번 개정판에 실린 330여개 오름을 비롯해 이제는 볼 수 없는 옛 한라산의 아름다운 생태 사진까지 모두 370여장의 사진을 기꺼이 제공했다.


1995년 330개 첫 탐사기 ‘오름나그네’

희귀암 버티며 출간 20일만에 별세

백록담 아래 선작지왓에 복간본 헌정

“25년만에야 ‘교정’ 약속 지켰어요”


1972년 19살차·반대 이긴 ‘불꽃 사랑’

신문에 결혼 광고 내 ‘쐐기’ 화제

“살아갈수록 존경…제주도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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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철은 광주서중고를 졸업하고 돌아와 교사를 거쳐 지역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편집국장·편성부장을 지냈다. 그는 1954년 입산이 허용된 이래 한라산을 1천회 이상 오르며 제주산악회를 창립하고 1961년에는 국내 첫 민간 산악구조대인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은퇴한 뒤 홀로 오름 탐사에 나선 그는 1990년 <제민일보> 창간 때부터 183회에 걸쳐 매주 답사기를 연재했고 이를 묶어 책을 만들던 중 ‘늑골암’ 진단을 받았다.


“서독의 광원들처럼 어깨를 많이 써서 걸리는 암이라고 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거운 배낭을 지고 산을 타다보니 생긴 거였죠. 희귀사례라며 원자력병원 의사들이 수술을 해보고 싶어했지만 거절했어요. 선생님은 병상에서도 저와 아들을 웃겨줄 정도로 초탈한 분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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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한평생 헌신으로 마무리된 책은 세계 최다인 제주 기생화산의 가치를 처음으로 조명해냈을 뿐만 아니라 제주 토박이 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살려낸 문장으로 ‘오름의 바이블’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제주의 지인들은 출간부터 개정판까지 <오름나그네>의 탄생에는 1972년 19살 나이차와 양가의 엄청난 반대를 뛰어넘은 김종철-김순이 부부의 ‘불꽃 순애보’가 절대적인 자양분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일찌기 제주여고 때부터 문예지에 이름을 알리고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나와 촉망받던 시인이었던 김순이는 청혼을 하고서도 가족 부양의 책임을 자신없어 하던 김종철에게 “내가 먹여 살리겠다”며 설득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당시 ‘제주도 대통령’으로 불릴만큼 막강한 부와 명예를 지녔던 부친(김도준)은 “살림은 차리더라도 제발 결혼은 하지 말라”고 애원했단다. 어머니 역시 수년 전 산악안전대를 소개한 라디오 방송에서 ‘처자식보다 구조를 먼저할 정도’라고 활약상을 과장했던 내용을 오해해서 ‘결혼했던 남자는 안된다’며 결사 반대했다. 끝내 서울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두 사람은 김종철의 생일 날인 72년 2월7일 <제주신문>에 ‘저희가 속리산 법주사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란 광고를 내고는, 실제로 그날 법주사에서 성타 스님의 주례로 둘만의 혼례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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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다들 물어보죠. 도대체 ‘왜 꼭 김종철이었냐’고요. 26살, 결혼을 결심할 때는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듯한 그를 잡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컸어요. 많은 것을 가졌지만 학식은 별로 없었던 부친에 대한 반발심도 있어서 더 악착같이 버틴 것 같고요.”


타고난 뚝심과 수완으로 사업을 일군 그의 부친은 제주도의회 의장시절 부산 군수기지사령부를 위문방문했다가 5·16 쿠데타 직전의 사령관 박정희와 친분을 맺은 덕분에 이후 내내 승승장구했다.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해오던 양묘업이 박정희의 산림녹화정책과 맞아 떨어져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시절 박정희 가족이 제주에 휴가 여행을 올 때면 부친은 또래였던 그 딸들과 순이를 어울려 놀게 했고, 청와대 초청 자리에도 ‘이화여대생’ 순이를 데리고 가곤 했단다. 그렇게 10명의 딸들 가운데 유독 자랑으로 여겼던 순이의 ‘반란’에 부친은 충격으로 보름이나 앓아 누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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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계를 위해 임시직으로 시작했던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자격시험에 합격해 민속연구원이 됐고 누구보다 열심히 조사하고 연구해 제주도문화재 전문위원이자 <제주신화>의 저자로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받았다. 1996년엔 수집해온 토속 유물들을 밥상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기증해 제주국립박물관 개관에 큰몫을 해냈다. 문학적 소양도 살려 시선집 <기억의 섬>(전예원) 등 여러 시집을 냈고 제주문인협회장을 맡는 등 지역 문화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해왔다.


“돌이켜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스스로도 놀랍죠. 어쩌면 ‘제주 여자들은 남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식 키울 능력이 있어야 산다’며 초등학생 때부터 방학마다 물질을 훈련시킨 외할머니 덕분인가 싶어요. 중학교 때 전복껍질 10개를 바다에 숨겨놓고 7개를 건져오자 ‘이제 됐다’ 하셨으니까요.”


어머니까지 3대가 해녀인 그는 해녀전승위원으로서 2016년 제주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이뤄내는 데 앞장섰고, 지난해 제주해녀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랑의 추억만 남긴 채 훌쩍 먼저 떠나보낸 이후 25년, 그에게 ‘김종철은 어떤 사람인가’ 다시 물었다. “살아갈수록 존경스럽고 큰 사람이에요. 5살 때 어머니, 15살 때 아버지, 이후에도 내내 불우한 환경 속에서 외롭게 살았지만 한라산과 오름들 속에서 그 자신은 물론 인간애를 잃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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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은 3년 전 은퇴하면서 가장 싸고 조용한 곳을 찾아 성산읍 난산리의 작은 집에 정착했다. 그와 함께 1박2일을 지내며 전해들은 수많은 일화 속에 떠오른 ‘인간 김종철’은 ‘4·3’을 비롯한 수많은 상처에도 의연하게 되살아난 제주도, 바로 그것이었다.


다빈치의 박성식 대표는 “제주 오름과 문화를 지켜달라는 김종철 선생의 유지와 두 분의 아름다운 순애보를 기리고자 복간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그는 바람까지 포착한 풍광으로 제주 오름을 널리 알린 사진집 <김영갑 1957-2005>(2006년) 출간을 계기로 김 시인과 인연을 맺은 이래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2012), <제주도>(2014), <제주신화>(2016) 등 부부의 책을 연이어 출간해왔다. 다빈치는 온라인서점 알라딘 펀딩을 통해 1천권 한정판으로 낸 <오름나그네> 양장본의 반응이 좋으면 보급판도 출간할 계획이다.


제주/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