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방향으로 갈 필욘 없어!"…시계가 거꾸로 도는 나라

[여행]by 한겨레

여행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여행

움푹 파인 고원에 세운 도시, 신기해

지역마다 다른 산소량, 부족마다 다른 체형인 이유

‘달의 계곡’은 신비한 풍광…마치 우주 행성 같아

출근 수단인 케이블카 타면 격렬한 재미 최고

한겨레

텔레페리코 ‘미라로드역’에서 바라본 라파스 전경. 사진 노동효 제공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도시, 목록을 만든다면 당신은 어느 도시를 선정하고 싶은가? 로마, 이스탄불, 파리, 런던, 프라하, 뉴욕, 바르셀로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나라면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를 절대 빼놓지 않을 것이다.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성당과 이색적인 야경이 펼쳐져서…가 아니라 ‘상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라는 인상 때문이다.

한겨레

산으로 둘러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라파스. 사진 노동효 제공

“어떻게 이런 도시가 한 나라의 수도일 수 있죠?”


엘알토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제 머리를 쥐어뜯는 승객이 속출한다.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본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라면 거짓말이고, 고산병 때문이다. 1983년 한국 축구대표팀이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 4강 신화’를 쓸 때 해설자가 해발 2000m를 거듭 강조하며 선수들의 고산병을 걱정하기에 멕시코시티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볼리비아의 행정수도 라파스의 해발고도는 무려 3600m, 이 도시의 국제공항은 해발 4000m에 있으며 공항 상비용품이 비상용 산소마스크다.

한겨레

고지대에 적응한 케추아족. 사진 노동효 제공

라파스는 ‘평화’(La Paz)란 이름에 걸맞잖게 많은 착각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첫째 라파스를 다녀온 많은 여행자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착각한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듯 보인다. 그러나 대낮에 해발 4000m 이상 올라간 뒤 서너 시간 줄곧 달리면 실체가 드러난다. 남북한 합친 면적보다 거대한 알티플라노고원에 움푹(이라지만 수백 미터에서 천 미터까지) 꺼진 땅에 세운 도시가 라파스다. 두 번째 오해는 ‘엘알토’(El Alto), 말 그대로 ‘높은 곳’에 거주하는 주민에 대한 여행자의 감상이다. 라파스 도심은 상업중심지로 고층빌딩과 상류층의 저택이 즐비하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짙은 갈색 레고를 수만개 쌓은 듯한 벽돌집들로 빼곡하다. 그래서 ‘꼭대기(?)엔 가난한 사람들 집만 있다’부터 ‘숨 쉴 수 있는 산소량마저 빈부에 따라 나뉘니 안타깝다’는 감상이 나열된다. 그러나 엘알토 주민 중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 벌면 좋은 집을 짓는 거야 당연하지. 근데 해와 달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짧은 데서 왜 사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가. 설산 너머로 지는 해와 지평선으로 뜨는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고원을 놔두고 말이야!”

한겨레

라파스 남쪽 10㎞ 지점에 있는 달의 계곡. 사진 노동효 제공

일출이나 일몰의 풍경은 그렇다 쳐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희박해지는 산소는 어떻게 견딜까? 볼리비아엔 대략 30여개 부족이 산다. 저지대 중간 계곡과 아마존 평원엔 치키타노족, 과라니족 등이 거주하고, 안데스 고지대엔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일찍이 고원에서 살아온 부족의 후손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케추아족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역도 선수인 줄 알았다. 두꺼운 상체, 튼튼한 하체. 선조 때부터 산소가 희박한 지역에서 살다 보니 세대를 거듭하면서 폐가 점점 커지고 가슴팍이 두꺼워졌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내가 헉헉거리자 한번은 케추아족 아주머니가 농을 했다. “너도 여기서 몇 년 지내면 해발 4000m에서 마라톤 종주도 할 수 있을걸!” 숨을 헉헉거리며 고원에서 사는 주민을 동정하는 건 여행자의 감상이고, 그들에게 4000m는 일상의 공간이다.


라파스의 볼거리 중 으뜸은 ‘달의 계곡’(Valle De Luna)이다. 라파스 도심에서 남쪽으로 10㎞, 진흙으로 된 산이 침식되면서 수만개 흙기둥으로 변한 곳인데 예전엔 ‘영혼의 계곡’이라 불렸다. 달의 계곡으로 이름이 바뀐 건 닐 암스트롱이 방문하고 “여긴 꼭 달의 계곡처럼 생겼군!”이라고 감탄한 후부터. 달의 계곡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종일 기둥들을 지켜보면 태양이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마른 흙색에서 귤색으로,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겨레

국회의사당. 숫자판도 바늘도 반대로 도는 시계가 인상적이다. 사진 노동효 제공

오랜 기간 스페인의 통치를 받은 까닭에 (북미는 영어권이라 앵글로색슨 아메리카, 남미는 스페인어권이라) 라틴아메리카로도 불리는 남아메리카, 도심에는 유럽식 광장과 유럽식 성당과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중에 중심지는 무리요 광장이다.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등 주요 관공서가 무리요 광장과 접하는데 이색적인 장면 하나가 눈에 띈다. 국회의사당 건물에 숫자판이 반대로, 바늘도 반대방향으로 도는 시계가 걸려 있다. 낯선 시계가 걸린 건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볼리비아 외무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시계가 항상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왜 우리는 항상 순종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창의적이면 안 되는가?” 그는 방향 바뀐 시계를 통해서 북미와 북반구가 주장하는 룰을 ‘일반’과 ‘상식’으로 여기는 세상에 대해 환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라파스 시민의 일상으로 들어가 보자. 당신은 출퇴근할 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가? 도시인이라면 대부분 버스나 전철, 자가용이나 자전거, 혹은 걸어서 출퇴근할 것이다. 근데 케이블카 타고 직장에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엘알토에 사는 인구는 약 90만명. 엘 알토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라파스 상업중심지를 잇는 더 많은 도로가 필요했고, 길을 놓기엔 가파르고,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찾아낸 방법이 ‘텔레페리코’라 불리는 케이블카다. 2014년 첫 라인 개통 후 현재까지 총 10개 라인으로 확장되었고, 각 라인은 시간당 평균 3000명을 태울 수 있다. 엘 알토에 사는 직장인(편도 500원)과 학생(편도 250원)은 텔레페리코를 타고 출퇴근하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한겨레

라파스와 엘알토를 잇는 대중교통수단 ‘텔레페리코’. 사진 노동효 제공

가장 전망 좋은 라인으론 이르파비역에서 델리베르타도르 환승역으로 이어지는 초록색 라인과 다시 델리베르타도르역에서 미라도르역까지 이어지는 노란색 라인이 있다. 대중교통이지만, 심장이 약하거나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탑승을 삼가는 게 좋다. 처음엔 신나겠지만 나중엔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힘들고, 아래위로 출렁일 땐 당장 내리고 싶을 테니까. 이르파비역에서 미라도르역까지 7.6㎞, 소요시간은 30분, 도시를 가로질러 해발 4000m로 올라가는 사이 당신은 지금껏 세계 어느 도시를 방문했을 때보다 더 격렬한 감탄사를 내뱉을지 모른다.


“세상에, 뭐 이런 도시가 다 있지!”


달이나 다른 행성이라고 해도 좋을 계곡에 빼곡히 들어찬 마을과 아슬아슬한 절벽에 서 있는 붉은 벽돌집들. 라파스를 내려다보면 우리가 알던 ‘상식’의 의미가, ‘일반적’이란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하는 의심이 인다. 더불어 떠오르는 엉뚱한 상상.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외계인이나 지구인의 후손이 떠나온 별을 방문한다면 스톤헨지, 피라미드, 모아이 석상 같은 유적과 더불어 라파스, 이 도시 자체를 ‘지구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을지 모르겠다고.

한겨레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드는 일리마니산(해발 6438m). 사진 노동효 제공

해지기 1시간 전 ‘전망’(Mirador)이란 이름이 붙은 미라도르역에 내려 동쪽을 바라보면 만년설을 얹은 일리마니산(6438m)이 보인다. 저무는 지구 남반구의 햇살에 설산의 하얀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움푹 들어가 있는 도심에선 몇 날 며칠을 지내도 볼 수 없었던 장면.


세상 모든 풍경은,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한겨레

[라파스 근교 유적지]


티와나쿠 유적지

라파스에서 차로 1시간30분 거리. 고대문명에 관심 있다면 당일 코스로 티와나쿠 유적지에 다녀오자.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티와나쿠 문명은 잉카보다 최소 1000년 이상 앞서며 티와나쿠 수도엔 28만명에서 148만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긴 세월 채석장으로 이용하면서 유적이 파괴되고, 주요 구조물은 건축자재로 사라졌다. ‘무 대륙’(기원전 7만년 경 남태평양에 존재했을 것으로 얘기되는 가상 대륙)처럼 초고대 문명으로 주장하는 학자를 비롯해 수많은 수수께끼를 낳고 있다. 현재 유적 복원이 진행 중이며 방문객은 피라미드, 반지하 사원,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티티카카와 코파카바나

라파스에서 차로 4시간 거리. 운송로로 이용 가능한 호수 중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해발 3810m, 서울 면적 13배 넓이. 티티카카 호변 마을 중 코파카바나가 가장 유명하다. 브라질 리우데하네이루의 해변과 이름이 같으며 바다 같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숙소와 히피풍 레스토랑, 수공예품을 파는 액세서리 가게가 있으며 휴양하기 좋은 마을이다. 칠레와의 전쟁에서 해안선을 빼앗겨 바다를 잃은 나라, 볼리비아의 해군기지도 티티카카 호수에 있다


[라파스 여행 정보]


가는 길

한국에서 라파스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한국~북중미(케네디, 댈러스, LA, 마이애미, 시카고. 멕시코시티 등). 북중미~리마(보고타). 리마(보고타)~라파스 노선을 갈아타는 게 가장 간편하다. 30시간 내외 소요.


유의사항

시차는 한국보다 13시간 늦다. 화폐단위는 볼리비아노. 6볼이 한국 돈 1000원 안팎. 전원은 대체로 우리와 같은 220V지만 플러그 구경이 작기 때문에 멀티플러그를 준비하는 게 좋다. 물은 반드시 생수나 끓인 물을 마시도록 한다. 외국인 상대 서비스업 종사자 외 대다수 현지인이 영어를 못하므로 최소한의 스페인어를 익히고 가는 게 좋다.


날씨

라파스는 3600m 고지대로, 강한 자외선에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다. 9월은 최고 기온 27도, 최저 기온 -1도까지 차이가 난다. 건기(4월~9월)와 우기(10월~3월)로 나뉘며 계절변화는 느끼기 어렵다. 건기엔 겨울옷, 우기엔 봄가을 외투를 챙겨가는 게 좋다.

글·사진 노동효 (여행작가·<남미 히피 로드> 저자)

2019.05.12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