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20년…‘한국’ 가린 보아에서 한국어로 부르는 방탄까지

[컬처]by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1세대, 일본어로 노래 등 현지화


2세대, 외국인 멤버 투입해 연착륙


3세대, SNS 활용·한국어로 승부


한겨레

케이팝은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인 ‘한류’(韓流)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한류가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문화 현상이 된 것은 일반적으로 1997년 중국 국영방송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방송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성공 이후로 여겨진다. 이후 2000년 초중반 드라마 <겨울연가>의 히트와 그로 인한 문화 현상인 ‘욘사마’(배용준의 일본 별명) 열풍을 통해 일본도 한류의 흐름에 합류했다. 음악 한류의 경우, 댄스듀오인 클론이 2000년 발표한 노래 ‘초련’이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을 시작으로 본다.


초기 한류의 주요 시장은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였다. 최근 한류의 중심이 드라마에서 케이팝으로 넘어오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남미, 유럽, 중앙아시아 등 전세계로 확장돼나가고 있다.


케이팝은 현지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현지화 전략(그 지역의 언어와 스타일로 노래)을 통해 앨범을 만들었던 1세대를 거쳐, 현지에 지사를 두고 국내에서 인기있는 아이돌의 음악을 현지에서 홍보함으로써 해외 진출을 모색했던 2세대를 지나,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 등을 기반으로 한국어 노래 자체로 승부하는 3세대로 발전해왔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2018 해외 한류 실태조사’)


일본 진출에 먼저 눈을 뜬 건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였다. 2000년대 초반 에스엠은 현지화 전략을 택했다. 현지 회사인 에이벡스와 합작해 일본 작곡가의 곡을 받아 일본 기획사에서 일본어 노래로 앨범을 냈다. 대표적인 가수가 보아다. 일본 대중들은 보아의 인기가 높아진 다음에야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2000년대 후반 동방신기도 같은 전략으로 일본에서 성공했다.


이후 현지에 지사를 두고 국내에서 인기있는 아이돌의 음악을 현지에서 프로모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한국어로도 노래를 부르지만, 현지 언어로 가사를 바꾸기도 했다. 일본, 미국, 중국, 타이 등 현지 국적을 가진 멤버들을 한두명씩 포함시켜 ‘연착륙’에 활용했다. 그 나라에 자신들을 소개하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2000년대 후반부터 투피엠(2PM), 슈퍼주니어 등이 중국, 타이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케이팝의 인기는 동아시아에서만 머물렀다. 동아시아 바깥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2011년 5월 에스엠 소속 가수들의 합동 공연 ‘에스엠 타운 라이브’(SM Town Live) 프랑스 파리 공연이었다. 이 공연의 표가 일찍 매진되면서 표를 구하지 못한 유럽 여러 국가의 케이팝 팬들이,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슈퍼주니어의 춤을 플래시몹으로 재현한 것이 화제가 됐다. 이는 케이팝이 동아시아가 아닌 지역에서도 팬을 늘려나가고 있음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유독 미국 음악시장의 벽은 높았다. 케이팝 가수들의 미국 팝 시장 진출은 2008년께 시작됐다. 당대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소녀시대, 카라, 비, 원더걸스, 보아, 투애니원(2NE1) 등이 진출했지만 모두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진출하는 데 실패했다. 보아가 2009년 빌보드 200 차트에서 127위에 오르고, 2014년 투애니원이 같은 차트 61위에 진입한 것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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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하는 큰 인기를 얻으면서 케이팝을 전세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후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고 미국 시장에서 케이팝의 인기는 주춤해졌다.


2017년 무렵 방탄소년단이 미국 시장에서 케이팝을 부흥하는 데 앞장섰다. 방탄소년단은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 다양한 디지털 채널을 활용해 해외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 노래로 승부하는 등 새로운 해외 진출 방식을 시도했다. 결국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톱 아티스트상을 3년 연속 수상하는 등 케이팝의 역사를 다시 썼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케이팝 제작시스템 변화: 케이팝의 양 날개’(2019) 보고서 “보아가 브랜드는 일본이고 만드는 건 한국인 일종의 오이엠(OEM) 방식이었다면, 이후 케이팝 그룹들은 한국이 기획과 제작을 맡고 현지인 멤버가 부품으로 투입되는 형태로 제작 방식을 바꿨다”며 “이런 시스템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의 연습생 시스템과 20년간 축적된 아이돌 육성 노하우를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기존의 케이팝 시스템에 몇가지를 더하고 뺀 결과”라며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면서 아티스트형 아이돌로 포지셔닝을 했고 소셜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풍부한 콘텐츠로 승부했으며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노래했다는 점이 기존 케이팝과 달랐다”고 평가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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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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