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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그에게 더 큰 안목이 있었더라면

by한겨레

[책과 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금단의 나라 조선

E. J. 오페르트 지음, 신복룡·장우영 옮김/집문당(2000)


1880년 독일의 라이프치히, 영국의 런던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한 권의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183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였다. 그는 19살 때인 1861년부터 상인 신분으로 홍콩에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기록은 없지만, <독일문헌총람>에 여행가, 인종학자로 소개된 걸 보면 상해, 홍콩, 일본 등지를 다니면서 독학으로 동아시아를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인종적인 편견과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책은 이전까지 조선을 다룬 어떤 책보다도 당시 조선의 상황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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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인을 상당히 우호적으로 평가한다. 조선인은 도전적이고 개방적이며 매우 정직하고 신뢰가 깊은 성품을 지녔으며 산업기술이 뒤처져 있긴 하지만, 약간의 지도와 격려만 있다면 중국이나 일본의 수준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관행 속에서 파벌싸움과 혼란을 거듭한다면 장차 러시아와 일본의 주도권 다툼으로 전쟁터가 될 것이며, 만약 이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이 승리의 제물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분석은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천주교 신부들, 중국과 일본에 머물던 각국의 외교관들과 왕래하며 얻어낸 정보가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그의 행동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63년 겨울,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새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상갓집 개를 자처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왕족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익성군이었다. 불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흥선대원군의 집권 10년은 천주교 박해,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등 국가의 위기이자 미래를 결정지을 사건이 연속되었던 중요한 시대였다. 서세동점의 위기 앞에서 대원군 역시 천주교 신자 남종삼을 통해 북경의 프랑스 주교들과 연락을 취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과 동맹을 체결할 의중을 품었었다.


안팎으로 능동적인 개혁과 개방이 요구되는 시기이던 1868년 오페르트와 프랑스인 페롱 신부, 미국인 젠킨스 등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의 사정을 제법 잘 알았던 이들이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까닭은 부장품에 대한 기대보다 남연군의 주검을 볼모 삼아 조선의 문호개방과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이 사건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대원군은 서양인은 조상의 능묘를 함부로 파헤치는 야만인이자 상종할 수 없는 도적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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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선생은 <조선통사>에서 이 시기 대원군의 권력에 대해 “주변의 간섭이 없었고, 아래에서 거슬리는 이가 없어 그가 명령하면 바로 행하였고 금지하라면 바로 그쳤다. 진실로 하려 들면 못할 것이 없었다”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삼정(전정·군정·환곡)의 개혁, 서원 철폐령 등 굵직굵직한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에게 더 큰 안목이 있었더라면, 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근대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박은식 선생이 “능히 큰일을 할 만한 자리였고, 그 재주 또한 큰일을 할 만했고, 시운(時運) 또한 할 만했었지만” 이루지 못해 애통해했던 역사의 그 순간이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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