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해 보이는 ‘로코’ 외피 속에 가부장제 겨냥한 씁쓸한 질문이…

[컬처]by 한겨레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17)결혼 이야기

감독 김의석(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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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야기>는 두 가지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화다. 먼저 ‘기획영화의 효시’다. 1980년대까지 충무로나 지방 토착 자본으로 제작되던 한국영화는 1990년대 새로운 돈줄을 만난다. 대기업이 진출한 것이다. 자본의 성격이 바뀌면서 영화도 바뀌었고, 관성이 아닌 기획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결혼 이야기>는 그 시작이었다. 대중의 트렌드에 대한 리서치 결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결정되었고, 상큼한 마케팅과 전자제품 피피엘(PPL: 콘텐츠 내 상품 간접광고)이 결합했다. 주연은 심혜진과 최민수. 당대 가장 ‘핫’하면서도 ‘뉴’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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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결혼 이야기>는 표면과는 다른, 꽤 묵직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였던 문성근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혼이란 뜨거운 감자를 삼키느냐 마느냐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혼 이야기>는 과감히 그 결정을 한 남녀들에 대한, 1990년대 현재 대한민국 부부 관계를 다룬 임상실험 보고서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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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론 코믹 톤이지만, 이따금씩 툭툭 던져지는 대사들은 관객을 비수처럼 찌르며 우리의 결혼제도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폭로한다. 전업주부는 가구 같은 존재라는 어느 선배는 지혜(심혜진)에게 충고한다. “너도 빨래판 꼴 된다. 평생 대주기만 하는 빨래판.” 여자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토록 암울한 묘사가 있었던가? <결혼 이야기>는 결혼이 서로 밀고 당기는 핑퐁이 아니라, 억압적인 가부장 체제에 여성이 걸어 들어가는 불평등한 계약임을 명시한다.


좋은 배우자란 없으며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 이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등의 영화가 등장할 수 있는 서사적 전통을 마련했다. 달콤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메시지를 품은 ‘당의정’. 이 전략은 기획영화 시대에 리얼리즘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술이기도 했다.


김형석/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2019.07.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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