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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한국 엘리트의 뿌리,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초상

by한겨레

일본 제국대학 유학 조선인들 추적


제국대학이 한국에 끼친 영향 분석


지배 엘리트 재생산 제도로도 기능


“실증적인 실체 복원·가치평가 해야”


한겨레

제국대학의 조센징-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음/휴머니스트·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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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84)은 1997년 대통령선거와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 패배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문학과 부교수는 “내게는 1997년과 2002년의 두 번에 걸친 대선 결과가 근 한 세기 동안 공고하게 계속된 귀족적 기득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거부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왜 이런 평가를 하는지 살펴보자.


이회창의 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지주였고, 큰아버지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 이홍규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후 검사를 했다.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냈고, 이모인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을 나왔다. 이회창의 장인 한성수는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원장 직무대행 및 대법관을 지냈다. 본가·외가·처가 모두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회창에게 ‘귀족’ 이미지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회창은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그의 가계도에는 ‘제국대학’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였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들을 추적한 책이다. 유학을 떠난 이들은 누구이고, 왜 떠났는지 그리고 제국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본다. 국문학자인 정종현 교수는 2010년 교토대에서 처음 조선인유학생 명부를 보게 됐다고 한다. 국외 출장 중인 정 교수는 <한겨레>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들 유학생 집단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 깜짝 놀라서 이 연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도쿄·교토 제국대학의 유학생을 전수 조사하고 나머지는 2차 자료를 토대로 했다. 책은 ‘친일 엘리트 양성소’이자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였던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얘기를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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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은 일본 본토에 7곳(도쿄·교토·도호쿠·규슈·홋카이도·오사카·나고야), 조선(경성)과 대만(다이호쿠)에 하나씩 모두 9개가 설립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구상이었다. 교수는 고급 관료로 신분이 보장됐고, ‘학사’라는 말도 제국대학 졸업생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부분 제국대학 또는 이를 승계한 국립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은 제국대학의 학문 수준을 가늠케 한다.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대략 784명,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들까지 더하면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성제국대학 출신보다 많다. 일본의 교육과 설비 수준이 높았다는 점과 함께, 식민지 청년이 받은 차별을 일거에 극복하고자 했던 열망이 유학을 자극했다. 일본의 제국대학 출신은 경성제국대학 출신보다 더 대접 받았다. 졸업장은 출세를 보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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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직 사장을 지낸 김연수(1896~1979)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1891~1955)의 동생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사업가였다. 이 일가의 사업이 번창하자 1932년 기자들이 ‘재벌’이라는 말을 붙였다. 김연수는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사업에서 ‘제국대학 네트워크’와 동문 의식은 큰 자산으로 작용했다.” 일본 패전 직후 만주에서 돌아올 때 남만방적의 물품을 일부 건질 수 있었던 것도 대학 후배인 일본인 철도국장이 화차 열 량을 배정해 준 덕분이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상협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와 전두환 정권 때 국무총리를 지냈다. “제국대학은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도 기능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귀족’과 조선왕조의 명망가, 지주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후예들이 유학했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힘겹게 유학생활을 한 고학생들이 많았다.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지원한 ‘관비 유학생’도 있었다. 제국대학은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이었다. 이회창의 이모 김삼순(1909~2001)은 한국 버섯 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과학자를 꿈꾸는 우리 사회의 아들딸들이 퀴리 부인만큼이나 기억해야 할 여성과학자, ‘그 이름은 김삼순’이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은 대개 관료와 교원으로 취직했다. 식민지에는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한 탓이다.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군수나 판검사가 됐다. “제국대학을 나온 우수한 두뇌와 유능함은 행정의 대상이 된 조선 민중에게는 큰 해악이었다.” 사법과 합격자는 총독부의 철저한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총독부 판검사 경력이란 한마디로 총독부가 보증한 친일파의 증명서”였다. 예외적 인간도 있었다.


영화 <동주>에 나오는 송몽규(1917~1945)는 “고향의 캄캄한 밤을 밝히려다 죽어서 별이 된 청년”이었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그는 ‘재(在)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윤동주와 함께 체포돼 감옥살이를 하다 숨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학생들은 조선에 돌아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친일파, 포르노 영화 브로커로 ‘타락’한 유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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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 출신들은 해방 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민관식(1918~2006)의 사례가 눈길을 끈다. 교토제국대학 출신인 그는 대한체육회장도 지냈는데, 1966년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국가 엘리트 육성 장치인 제국대학과 국가 대표를 입소시켜 집중 육성하는 태릉선수촌의 체육 엘리트 육성 시스템은 그 세계관과 실제 작동방식이 흡사하다.” 그가 한 가장 큰 일은 ‘고교평준화’다.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4년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고교평준화를 검토하는데 그 해결책을 일본에서 찾는다. 문교부 직원을 파견해 고교 배정 입학제도의 실상을 조사하게 하고, 일본의 정책을 한국에 맞도록 변형해 시행한 게 고교평준화였다. “제국대학 유학생 민관식에게 일본은 급할 때 참조할 수 있고, 참조해야만 하는 늘 앞서가는 근대(성)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분야”는 교육과 학술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문 계보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제국대학 출신들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한 이들도 제국대학 출신들이었다.


지은이는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한 근대의 경험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짚는다. 정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민족/반민족의 도덕적 잣대를 통해 모두 부정해 버린다면 한국 사회의 중요한 한 기원에 대한 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며 “진정한 의미에서 식민지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근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집단의 실체를 실증적으로 복원하고 그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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