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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by한겨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딸과 함께한 자화상’

한겨레

젊은 엄마는 9살 난 딸을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딸은 엄마의 목을 끌어안은 채, 엄마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다. 마치 이들의 정서적 유대가 얼마나 견고한지 과시하는 듯하다. 강하게 얽혀 있는 이 모녀의 세계를 누가 감히 깨뜨릴 수 있을까 싶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파괴한 이는 그들 자신이었다. 프랑스의 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과 외동딸 쥘리가 그 주인공이다.


열혈 왕당파인 비제 르브룅은 <딸과 함께한 자화상>을 그리자마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딸 쥘리만 데리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그녀는 그 뒤 12년 동안 유럽 각국을 돌며 왕족, 귀족의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었고, 싱글맘 생활을 버텨냈다. 반면 고국에 남은 남편은 그녀의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등록해 술, 도박으로 탕진했다. 분통이 터지고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딸 쥘리의 존재는 비제 르브룅의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교육을 위해 딸을 수녀원으로 보내는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개인교사를 고용해 딸을 곁에 두고 최상의 교육을 시켰다. 덕분에 쥘리는 영어와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피아노와 기타 반주에 맞춰 이탈리아 노래도 척척 부르는 교양 있는 여성으로 자라났다. 엄마의 피를 물려받아 그림 솜씨까지 뛰어났다. 엄마의 자랑이자 희망, 삶의 고단함을 거침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그가 바로 쥘리였다. 안타깝게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 비제 르브룅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당시 쥘리는 친구이기는커녕, 엄마가 만든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의 고생을 직접 보며 들었던 죄책감, 자라는 내내 아빠에 대한 험담을 들어야 했던 괴로움. 이 모든 감정이 쥘리를 짓눌렀다. 엄마의 헌신은 물론 감사했지만 무거운 부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랑과 보호’를 명목으로 사사건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던 엄마가, 급기야 결혼 상대까지 일방적으로 정해놨다는 걸 알게 되자 마침내 쥘리는 해묵은 감정을 터뜨리고 만다. 1799년 쥘리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그리라는 청년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해버렸다. 이때 비제 르브룅은 딸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쥘리는 이혼했지만, 모녀 사이는 결코 예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1819년 쥘리가 병으로 일찍 사망할 때조차 비제 르브룅은 딸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더없이 다정해 보이는 <딸과 함께한 자화상> 속 그들의 미래가 엉망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유독 쥘리가 이기적인 딸이라서였을까. 그보다는 비제 르브룅이 딸을 자신의 분신이나 소유물, 더 나아가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모녀 관계가 이처럼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을 것이다.


비제 르브룅의 전기를 읽으며 착잡함에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 속 쥘리와 동갑내기인 딸아이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엄마, 나 원래 하늘나라 천사였거든. 누구 딸로 태어날까, 땅을 내려다보다가 엄마를 보고 딱 골랐지 뭐야. 저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날 거라고.”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딸아이는 분명 내 표정을 한참 살폈을 것이다. 딸의 깜찍한 위로가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그동안 내 감정, 내 인생의 무게, 내 피곤함이 여과 없이 딸에게 전달된 건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됐다. 서둘러 딸에게 말했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야. 엄마 눈치 보지 말고 너 좋을 대로 기쁜 대로 살아. 그러면 엄마는 저절로 행복해질 거야.” 사실 이 말은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