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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작고 귀엽다고
약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by한겨레

‘여동생’ 그 이상의 배우 박보영

작고 귀엽다고 약하기만 한 건 아니에

'힘쎈여자 도봉순'은 매회 보는 이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모계 유전으로 괴력을 물려받은 봉순이 그 힘을 꼭꼭 숨기고 살다가, 여자라고 약하고 힘없을 거라 지레 무시하는 남자들의 편견을 힘으로 꺾어버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쾌감이 밀려오는 걸 주체할 수 없다. ‘힘쎈여자 도봉순’ 누리집

“야, 나 머리 맞는 거 싫어해. 그리고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것도 싫어하거든? 너 지금 연타로 내가 싫어하는 거 하잖아. 그러지 마.”

 

동네 불량학생의 꼴같잖은 시비를 참고 견디던 도봉순(박보영)은 상대가 자신의 머리를 치기 시작하자 인내심을 잃고 경고한다. 왜소한 체구의 젊은 여자가 던지는 엄포 따윈 무섭지 않다는 듯 불량학생은 봉순의 뺨을 툭툭 치는 것으로 응수하지만, 봉순은 상대가 마지막 경고에도 물러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괴력을 발휘해 상대의 손목을 꺾고는 혁대를 잡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린다. 함께 몰려온 패거리들이 경악하며 뒤로 나자빠지자, 봉순은 허공에 들어 올린 불량학생을 종잇장 흔들듯 탈탈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야, 너희들. 내가 경고하지 않았니?” 그러게. 사람이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났어야지. 제이티비시(JTBC) 금토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은 매회 보는 이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모계 유전으로 괴력을 물려받은 봉순이 그 힘을 꼭꼭 숨기고 살다가, 여자라고 약하고 힘없을 거라 지레 무시하는 남자들의 편견을 힘으로 꺾어버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쾌감이 밀려오는 걸 주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괴력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사람이, 늘 ‘국민 여동생’이란 수식어와 무해한 이미지로 대표되던 박보영이란 사실은 그 쾌감을 몇 배로 키워준다.

외모와 나이 덕분? 탓?

‘국민 여동생’, 참 오랫동안 달아야 했던 단어다. 2008년 '울 학교 이티' 기자간담회 당시 이한위가 “제2의 문근영을 찜해놓은 후배”라고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같은 해 개봉한 '과속스캔들'의 흥행은 박보영을 세간의 시선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기세도 좋게 여섯살 아들을 데리고 집에 쳐들어와 내가 당신의 딸이라 말하는 정남을 연기한 저 당돌한 신인은 대체 누구지? 극장을 찾은 800만명은 그를 궁금해했고, 그해 유수의 영화제들은 박보영에게 신인상을 안겼다.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을 포함한 8개의 신인상을 안은 그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문근영과 김연아의 뒤를 잇는 ‘국민 여동생’의 자리에 불려갔다.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을 가득 메운 둥글고 큰 눈망울과, 작아서 누구든 올려다봐야 하는 신장은 무해하고 귀여운 인상을 완성했다.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내게 늘 웃어줄 것 같은 사람. 박보영은 이래저래 세상이 바라는 ‘국민 여동생’의 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작중에서 자신의 아버지 현수(차태현)의 집에 알박기를 하고는 강단있는 언변으로 현수를 휘어잡는 주체적인 캐릭터 정남을 연기했음에도, 사람들은 박보영의 외양과 나이를 이유로 그에게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을 붙여버렸다. 젊은 여성을 귀엽거나 예쁘거나 섹시한 존재의 카테고리로 나누는 것 말고 다른 관점으로 소비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가장 가깝고 익숙한 타이틀을 게으르게 부여한 것이다.

 

2008년 ‘과속스캔들’로 등장

‘국민 여동생’으로 자리매김

긴 공백기·20대 후반 나이에도

귀엽고 예쁜 이미지로만 소비돼

 

당찬 싱글맘·악플러·괴력 학생…

실제 배역들은 정반대 이미지

세간의 시선, 영리하게 역이용

외모 뒤집는 ‘괴력’ 안방 점령

 

'과속스캔들' 이후 원치 않은 공백기를 4년이나 겪었음에도, 한번 부여된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한국방송 '해피선데이' ‘1박2일’ 여사친 특집에 초대된 박보영을 둘러싸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던 ‘1박2일’ 멤버들의 즉물적인 반응이나, 조금만 독특한 배역을 맡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가 알던 그 국민 여동생이 맞나 싶다” 운운하는 말로 서두를 여는 인터뷰 기사들, 그에게 카메라와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연인에게 말을 걸듯 잔뜩 애교를 넣은 목소리로 “남자가 (게임을) 하고 싶을 때 해야죠. 무슨 남자가 하고 싶단 말도 못하냐”고 말하도록 주문한 모바일 게임 광고나, 심지어 20대 후반에 접어든 박보영에게 ‘방송을 보고 있을 오빠 팬들에게 애교를 부탁드린다’는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연예정보프로그램 리포터까지, 모두가 무심코 박보영을 한 패턴으로만 소비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우며 내 욕망을 거절하지 않고 들어줄 무해하고 착한 여동생. 그렇다고 그게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배우를 외모로만 판단하고 가두는 것은 분명 조금은 게으르고 무례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스타 산업에서 루키즘을 완전히 도려내고 이야기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작고 귀엽다고 약하기만 한 건 아니에

20대 후반에 접어든 박보영에게 ‘방송을 보고 있을 오빠 팬들에게 애교를 부탁드린다’는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연예정보프로그램 리포터까지, 모두가 무심코 박보영을 한 패턴으로만 소비하고 있었다. ‘힘쎈여자 도봉순’ 누리집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박보영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살펴보면, 상황은 조금 흥미로워진다. 박보영이 분해왔던 인물들은 대부분 ‘무해하고, 내 이야기를 마냥 잘 들어줄 것 같은’ 인물이 아니라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과속스캔들'의 정남은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아버지에게 따져 묻는 당찬 딸이었고, 같은 해 찍은 '초감각 커플'(2008)의 현진 또한 뛰어난 두뇌로 수민(진구)을 제 마음대로 부리다시피 하며 쉴 틈 없는 말들로 상대를 놀려 먹는 천재였다. '피 끓는 청춘'(2014)의 영숙은 등장 첫 장면부터가 패싸움 장면인 질풍노도의 청춘이었고, '돌연변이'(2015)의 주진은 생동성 실험 부작용으로 점점 생선으로 변해가는 남자친구 구(이광수)의 사연을 인터넷에 팔아 주목을 사려는 가장 보통의 악플러였다. 병약한 몸으로 기숙 여학교에 들어왔다가 작품 말미에 가서는 철제 문을 뜯어 던지는 괴력을 선보이며 자신과 제 친구를 억압하던 학교를 단신으로 박살내던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2015)의 주란쯤 되면, 박보영이 정말로 순종적이고 무해한 인물을 연기한 적이 과연 있긴 했던가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뭐야, 국민 여동생 운운하던 사람들은 작품을 제대로 보긴 본 거야?

 

여기에서 박보영이 제 외모를 보는 세간의 시선을 역이용하는 공식이 나온다. 박보영이 연기하는 인물들의 첫인상은 자주 연약하고 대체로 무해해 보인다. 그러나 보는 이들이 그러한 외모에 방심한 찰나를 틈타, 박보영은 제 몸을 빌린 인물들의 엉뚱하고 괴팍하며 때로는 무시무시한 면모를 기습하듯 화면 위에 투척한다. 툭 치면 부서질 듯 병약하던 '경성학교'의 주란이 뜀틀을 훌쩍 뛰어넘고 일제 군경들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내는 이 급격한 낙차. 그가 기껏 제약회사에서 탈출한 남자친구 구를 도로 제약회사로 팔아 치우는 '돌연변이'의 주진을 연기할 때나, 열정을 운운하며 후배 기자들에게 불합리를 강요하는 선배의 말을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 비아냥거리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2015) 속 스포츠신문 수습기자 도라희의 냉소를 그려낼 때 오는 충격은 세간의 편견을 역이용한 되치기인 셈이다. 그가 티브이엔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숫기 없고 얌전한 봉선과, 성불하기 위해 제 음기를 견뎌낼 인간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녀귀신 순애(김슬기)가 빙의된 상태의 음탕한 ‘봉애’의 양극단을 연기해 낸 것은 이러한 되치기의 결정판이었다. 자신을 무해한 이미지 안에 가두려는 세상을 향해, 박보영은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역이용한다. ‘놀랐죠? 작고 귀여워 보이는 사람이라고 당신 생각처럼 약하거나 순하기만 한 건 아니랍니다’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2017년 도봉순이 되다

그러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내내 힘을 숨기고 억누르며 살아오던 봉순은, 어쩌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을 무해한 이미지라는 설탕 옷을 입혀 유통시켜온 박보영이 아니면 연기할 사람이 없는 역할이었는지 모른다. 유독 여성에게만 더 가혹하게 부여되었던 온갖 사회적 제약과 암묵적 굴레에 대한 저항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2017년, 봉순은 “최근 들어 자꾸 힘을 조절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느낀다”며 그 이유를 고민하다가도 극 중 펼쳐지는 연쇄 여성혐오 범죄 앞에서 “이 힘을 쓰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제 힘을 감출 필요도 없고 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이 의미심장한 시기에, 가장 무해해 보이는 이미지의 배우가 제 괴력을 뽐내며 안방극장을 점령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