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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창작의 고통 함께 한 소설가 애증품들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전

by한국일보

조정래 아리랑 집필때 쓴 펜

김승옥 최명희 육필 원고 등 전시

한 문장이 완성되기까지 고뇌 오롯이

“나는 내 모국어의 조사를 증오한다. (…) 조사를 읽지 않으면 어떠한 논리 구조나 표현에도 도달할 수 없다. 조사를 작동시켜만 비로소 문리가 통하고 사유가 전개되는 이러한 언어가 나의 모국어인 것이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작가를 가장 괴롭힌 건 조사였다. ‘은는가이’의 미세한 틈 속에서 헤매던 작가는 결단을 내렸고, 훗날 그 결단의 고통을 증오라고 회고했다.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전

작가들이 문장을 벼릴 때 함께 한 물건들. 연필깎이와 사전, 돋보기, 담배는 물론이고 김훈 작가가 길에서 주워와 서류함처럼 쓰는 중국집 철가방, 고 박완서 작가가 글이 막힐 때마다 밭에서 호미질하던 호미도 국립한글박물과 전시회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에서 볼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소설 속 문장을 통해 한글의 가치와 특징을 소개하는 전시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가 2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국립한글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소설가들이 끊임없이 글을 쓰고 고치며 마침내 만족할만한 문장 앞에 서기까지, 고난의 여정에 동반자가 돼준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급하게 휘갈겨 쓴 취재수첩, 닳아빠진 펜,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사전, 돋보기, 초고가 담긴 원고지, 속절없이 피워 물던 담배까지, 모국어를 다스리기 위해 고투를 벌이던 소설가들의 애증 어린 전시품이 가득하다.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다'전

조정래 소설가는 한개의 펜에 펜심 580여개를 갈아끼우며 '아리랑'을 집필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원고지 2만매에 달하는‘아리랑’을 집필하면서 단 한 자루의 펜만 사용했다. 잉크가 닳으면 계속 심을 바꿔가며 손에서 놓지 않은 결과 펜심 580여개가 쓰였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펜심으로 이뤄진 작은 무더기 옆에 작은 종이 함께 전시됐다. 조씨가 글을 쓰다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가족을 부르기 위해 흔들었던 종으로, 작가는 “해맑고 깊은 울림이 글 쓰는 피로를 잠시 씻어 준다”고 설명했다.

“기계라고는 자전거밖에 모른다”할 만큼 자전거에 유별난 애정을 보인 김훈 작가는 자신이 타던 자전거와 법전을 내놨다. 대부분 작가들이 사전을 옆에 놓는 반면, 김씨는 틈틈이 법전을 읽는데 “수많은 어휘의 보고”이자 “인간의 모든 행위를 국가 사법기관이 어떻게 다뤄야 되느냐를 써놓은” 중요한 자료라는 것이 이유다.

이밖에 작고한 최인호 작가가 취재노트와 필기구를 넣어 다니던 작은 가방, 김승옥 ‘무진기행’의 서두 육필원고, 최명희 ‘혼불’ 육필원고, 황순원 마지막 장편소설 ‘신들의 주사위’ 육필 원고 등이 나왔다.

소설의 숨은 주인공인 교열가와 번역가들의 고뇌도 조명한다. 교열기자 출신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의 오류 수백 개를 잡아낸 엄민용 전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 부회장과 장 주네 ‘사형을 언도 받은 자’를 우리말로 번역한 조재룡 고려대 교수, 한국 소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정하연 이화여대 교수 등이 인터뷰 영상을 통해 언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어려움에 대해 털어 놓았다.

전시에 참여한 소설가 윤후명씨는 “지금은 이미지가 메시지를 선행하는 세상”이라며 “이야기 중심이던 소설이 문장 중심의 소설로 바뀌면서 올바른 우리 글 사용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전시장 한 켠에는 관람객들이 앉아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조성했다. 소설 쓰기 체험, 소설 속 음악과 영화 체험하기 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전시를 기획한 이건욱 학예연구사는 “소설쓰기는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구증구포의 산물”이라며 “소설 속 주옥 같은 문장을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