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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스위스 방명록' 外

여행책,
인문학·그림과 만나다

by한국일보

여행책, 인문학·그림과 만나다

미국 데스밸리를 찾은 일러스트레이터 이다는 한참을 앉아 대지의 풍광을 그려 냈다. 사진은 평야를 온통 갈색 빛으로 담아냈는데 그쳤지만, 그녀의 눈과 스케치북에는 붉고 노랗고 푸른 색감이 오롯이 담겼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훌쩍 떠나고 싶지 않은 자, 누가 있으랴. ‘언제 어디서 무엇’을 고민하는 순간, 결단 혹은 대리만족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여행서. 클릭 한 번으로 적잖은 정보수집과 예약이 해결되는 시대거늘, 가방에 한 권쯤 챙겨 넣지 않으면 허전한 마음은 여전하다. 이 같은 심리를 놓칠 리 없는 출판계에서는 연중 숱한 여행 관련 서적들의 각축전이 벌어진다.

명소 호텔 맛집 정보를 샅샅이 담은 고전적 가이드북은 물론,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는 유명인들의 여행기부터, 미문(美文)으로 여행에세이 열풍을 이끈 ‘이병률류’의 산문집까지. 따로 또 같이, 빠르게 혹은 느리게 등 다양해진 여행 풍토에 따라 여행책들도 여러 모습이다.

올 들어 나온 여행서들은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이나 고운 빛깔을 입은 손 그림과 만나 보다 깊이, 보다 샅샅이 느끼는 느린 여행의 시대를 선포하고 있다. 여행책을 흠뻑 물들인 사색과 물감의 매력은 무엇일까.

사람과 철학을 만난다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인 노시내 박사의 ‘스위스 방명록’은 스위스의 문학 철학 예술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파고든 에세이다. 니체가 걸었던 호숫가, ‘빌헬름 텔’을 만든 실러의 자취 등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풍경을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불러낸다. “그들이 남긴 유무형의 창조물을 통해 스위스의 일면을 소개하는 것”이 목표다. 고전을 되짚다 보면 이방인과 현지인이 모두 놓치기 쉬운 오늘날 스위스의 인종차별, 고립주의, 성불평등에 대한 단상이 펼쳐진다.

책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문사철 거장의 언명들, “베를린으로도 뮌헨으로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거기선 저녁에 산들이 장밋빛을 띠지 않거든요”(헤르만 헤세), “스위스는 안락함으로 사회주의를 질식시키는군요”(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은 책을 한 구절 한 구절 아껴 읽고 싶게 만든다. 미국(8년), 일본(4년), 오스트리아(4년), 스위스(2년)를 오가며 타지생활을 해온 저자는 전작 ‘빈을 소개합니다’에서도 시민들의 삶, 과거사 문제, 디자인 등을 깊이 다뤘다.
여행책, 인문학·그림과 만나다

스위스 방명록, 노시내 지음, 마티 발행, 464쪽, 1만6,500원 /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김덕영 지음, 도서출판 길 발행, 473쪽, 2만5,000원 / 세계를 읽다 이탈리아, 레이먼드 플라워ㆍ알레산드로 팔라시 지음, 임영신 옮김, 가지 발행, 312쪽, 1만6,500원.

학술서와 인문대중서, 여행서의 경계를 오가는 또 다른 책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는 “도시기행으로 포장된 사상기행”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사회학자인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는 5개국 28개 도시에서 칸트, 하이데거, 니체 등 사상가들의 흔적을 통해 독일 지성사의 골자를 그려낸다. 사상가의 흔적, 도시의 모습, 마주친 이들과의 대화 위에 완성되는 독일의 풍경은 에세이만으로는 해갈되지 않았던 지적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영미권에서 인기를 끈 인문여행책 시리즈 ‘컬쳐쇼크’도 번역 출간됐다. 한국어 판 ‘세계를 읽다’는 현지인의 생활 문화 기질, 관습과 예법, 역사적 배경지식, 요리와 와인, 건축과 미술, 음악, 문학 등을 다루는데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여행서다. 터키, 호주, 프랑스, 이탈리아 편이 나왔다. 출판사 가지의 박희선 대표는 “짧게 여러 나라를 돌기보다 장기든 단기든 한 곳을 자세히 보는 ‘모노여행’을 추구하는 경향 속에서 문화적 스토리가 탄탄한 여행서가 필요할 것으로 봤다”며 “이들 책은 서점에서도 취미ㆍ여행이 아닌 교양인문 코너에 비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행책, 인문학·그림과 만나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끄적끄적 길 드로잉'의 한 장면.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스케치북 들고 떠나볼까

눈길을 끄는 사진이야말로 여행서의 미덕이건만, 카메라를 내려 놓자 비로소 보인 사소한 풍경에 집중한 책들도 있다. 일러스트 여행서 '이다의 작게 걷기’는 화려한 명소 대신 국토 곳곳의 소박한 풍경을 한층 더 느긋하게 느끼는 여행을 추구한다. 스케치북과 필기구를 가지고 떠난 통영의 봄, 서울의 여름, 경주의 가을, 아산의 겨울 등이 오밀조밀한 그림으로 담겼다.

자신의 블로그에 길에서 뭐든 그린다는 ‘길 드로잉’이라는 단어를 내걸고 일러스트를 선보여 온 저자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막는 한 방문지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린 것을 계기로 길 드로잉을 해왔다. 오프라인에서 연 강연 반응도 좋았단다. 별스러울 것 없는 그의 여행기는 “여기저기 다닐 것 없이 한 군데에 돗자리 펴고 드러누워 과자나 까먹으며 아무 것도 안하고 낮잠이나 한숨 자는 것이 바로 경주 최고의 기쁨”이라고 외친다. 어디선가 ‘모험을 즐겨야 마땅할 청춘이 호기롭지 못하게 무슨 짓이냐’는 불호령이 들려오는 듯도 하지만, 세계를 누빌 기력 따윈 소진해 버린 지친 영혼들에게는 이보다 더 달콤한 여행도 없을 터.
여행책, 인문학·그림과 만나다

제주 담다 제주 닮다, 배중열 글 그림, 재승출판 발행, 392쪽, 1만6,000원 / 이다의 작게 걷기, 이다 글 그림, 웅진지식하우스 발행, 288쪽, 1만4,000원 / 끄적끄적 길드로잉, 이다 글 그림, 웅진지식하우스 발행, 224쪽, 1만3,000원

마음은 굴뚝같아도 서툰 스케치 실력 덕에 유치원생 조카의 비웃음만 샀던 이들을 위해선 드로잉 입문서 ‘끄적끄적 길 드로잉’도 선보였다. 여행서보다는 미술책에 가까운 이 책은 음식 그리기, 지도 그리기, 쓰기 쉬운 재료, 현장의 재미를 첨가하는 요령 등을 소개하며 ‘그리는 여행’의 묘미를 전한다. 연필 등 실력이 금방 탄로 낼 재료보다 콩테나 크레용 목탄 같은 굵은 재료로 그려야 쉽게 그림이 좋아 보인다는 등의 조언이 컬러링북 열풍과 맞물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독자들의 색칠 본능과 창작욕을 자극한다.

배중열 작가가 쓰고 그린 ‘제주 담다, 제주 닮다’ 역시 하도리 철새, 선흘리 서천꽃밭, 전통주 고소리술, 당근 밭의 할망 등의 풍경을 여리되 또렷한 선으로 그려낸 제주 여행기다. 그 밖에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재승출판), ‘손그림 여행 인 유럽’(효형출판), ‘드로잉 모로코’(나비장책)등도 물감으로 여행지를 펼쳐 보인 여행서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과 색감으로 생동하는 여행서들을 가만히 넘기다 보면, 내일이라도 집 밖에서 학자들의 지성 기행을 되짚거나, 나뭇잎을 그려보고 싶어진다. 유럽은커녕 서울 밖을 벗어나기도 여의치 않은 날, 반나절쯤 카페에 틀어박혀 책 속 한 장면이나 창 밖을 그려보는 것도 못난 계획 같지만은 않다. 방을 훑는 눈길이 바빠진다. 색연필을 어디 뒀더라.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