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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대기업 근로시간 단축 느는데...
중소기업은 야근 밥 먹듯

by한국일보

삶의 질까지 양극화 심화

신세계ㆍ삼성전자 등 선제적 시행

임직원들 칼퇴근 늘어 신바람

중기는 일손 부족해 여전히 격무

수당도 못받아 상대적 박탈감

대기업 근로시간 단축 느는데...

이마트 직원의 컴퓨터 모니터에 컴퓨터 자동 ‘셧 다운’ 안내 메시지가 떠 있다. 이마트는 오후 5시가 되면 30분 이내 컴퓨터가 꺼진다는 안내 메시지를 직원 컴퓨터에 자동 송출하고 있다. 이마트 제공

“6시 칼퇴근으로 저녁 있는 삶을 되찾으니 애사심도 저절로 솟아요.”(대기업 30대 사원)

 

“월급이 대기업보다 적은 건 참겠는데, 수당도 못 받고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하는 건 생각 못했어요.”(중소기업 30대 사원)

 

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신세계, SK하이닉스 등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직원들의 근로시간 단축이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신조어)을 앞세우며 일부 대기업에서 선제적으로 시작된 근무시간 단축 움직임이 늘어나자, 여건상 당장 근로시간을 줄일 수 없는 중소ㆍ중견기업 임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 주당 최대 68시간이던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시간 단축법’도 조만간 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여, 일할 사람을 찾기 힘든 중소ㆍ중견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수도권 소재 중견기업에 입사한 2년차 직장인 김 모씨는 설 연휴 뒤 사표를 내고 대기업 입사 시험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연봉 3,300만원에 주 5일 근무 등을 약속한 중견기업에 취직한 후 다행으로 여겼지만, 대기업에 취직한 대학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 씨가 퇴직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워라밸’의 붕괴다.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야근이 거의 매일 반복됐고 회사 사정상 제대로 된 보상도 받기도 어려웠다. 김 씨는 "연봉이 대기업보다 적은 거야 감수하고 입사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일에만 치어 살 수만 없다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했다"며 "근무시간이 일정하고, 혹 야근을 하더라도 제대로 보상해 주는 대기업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근무하는 윤 모 과장은 요즘 퇴근할 때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입사 후 백화점이 문을 닫는 오후 8시 이후를 퇴근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올해부터 주당 35시간 근무체계가 적용되면서 퇴근 시간이 2시간이나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오전 10시에 출근하는 윤 과장은 아침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외국어 학원을 등록했다. 퇴근 후에는 회사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일찍 집에 들어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윤 과장은 "유통업 특성상 야근은 물론 휴일 근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휴일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됐다"며 "좋은 근무 환경에 애사심도 높아져 더 열심히 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근로시간 단축 느는데...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에 근무하는 한 직원이 오후 5시에 퇴근한 후 사내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자녀와 함께 귀가하고 있다. 이마트 제공

지난해 7월 일부 부서를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범 운영하면서 가장 먼저 근로시간 단축에 들어간 삼성전자는 지난달 15일 전체 임직원의 주당 근로 시간이 52시간을 넘기지 못하도록 근태 입력 시스템을 개편했다. 올 초 연구직 직원으로 입사한 B씨는 “연구개발(R&D) 쪽 조직은 야근과 특근이 기본이라는 얘기를 듣고 입사했는데 상사가 퇴근을 독촉하는 분위기라 놀랐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2월 한 달을 주 52시간 근무제 시범운영 기간으로 잡았다. 다음 달부터 직원들의 근무 시간이 52시간을 넘는 부서장에 경고를 하는 식으로 시스템을 개편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시범운영 기간을 거쳐 여러 변수를 살펴보고 주당 52시간 근무체계를 본격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LG전자도 이달부터 일부 사업부문에서 주 52시간 근무체제를 도입하는 등 근로시간 단축 분위기가 IT업계의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휴일과 야근 근무가 잦은 유통업계에서도 근무시간 단축 바람이 거세다. 신세계그룹은 올해부터 모든 임직원의 근무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파격적으로 줄였다. 유통업계 특성상 점포 상황에 따라 직원 개개인의 출퇴근 시간은 유동적이지만 오전 9시에 출근 한 직원은 오후 5시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 35시간 근무제가 국내 기업에 도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세계 그룹 관계자는 “제도 시행 한 달 만에 근무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임직원들의 자체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야근과 회의 등이 없어지니 생산성이 더 향상됐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ㆍ중견기업계는 여건상 근로시간을 줄일 수 없어 대기업 중심의 이런 움직임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특히 근로시간 단축이 법제화되면 추가 인력이 필요해 인건비 증가 등 경영난을 우려하는 중소기업 경영진들은 정치권의 근로기준법 개정 움직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인천에서 금속 가공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 대표는 “근로시간이 단축법안이 어떻게 통과될지 두고 봐야겠지만 3교대로 24시간 공장을 돌리는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휴일 수당과 야근 수당 지급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기존에 추진했던 ‘주 52시간 근무, 휴일ㆍ연장 근로 중복 할증’ 등의 안이 시행되면 버틸 수 있는 중소기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근로시간 단축 느는데...

경기도에서 직원 10여명을 고용해 의류 가공업을 하는 송 모 대표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직원 2명을 해고했는데, 근로시간 단축으로 직원을 더 뽑고 야근ㆍ휴일근무수당까지 더 줘야 한다면 그냥 공장문을 닫겠다”며 “노동자 삶도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영세 중소기업들 살길은 마련해주고 정책을 추진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단축 이슈로 근무 환경이 좋은 대기업만 선호하는 현상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뚜렷해질 거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일자리 간 근무환경 격차가 벌어지면서 심각한 취업난에도 중소기업에 취직하려는 청년들은 좀처럼 늘고 있지 않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탄탄한 중견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비용증가보다 우수 인재 이탈 등을 더 우려하고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이 안 그래도 대기업의 높은 연봉을 부러워하는 상황에서 근로시간까지 차이가 나면 누가 중견기업에 입사하려고 하겠냐는 것이다.

 

제조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김 모 대표는 “연봉도 그렇지만 갈수록 대기업과 중소ㆍ중견기업 간의 근무 환경 격차가 벌어져 더 큰 문제”라며 “야근 수당을 제대로 다 준다고 해도 칼퇴근을 보장하는 대기업에 입사하려는 게 요즘 청년들의 기본 생각이라 우리 같은 중견기업이 우수 인재를 뽑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노동자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근로시간 단축은 필요하지만 이로 인해 일자리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영기 한림대 교수는 “대기업이 근무시간을 줄일 때 중소 협력사들도 근무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보완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대기업만 근무 환경이 좋아지는 근무시간 단축은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