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토닥토닥 "잘 될 거야"...
출판계에 '멘토 캐릭터' 열풍

by한국일보

빨강 머리 앤ㆍ곰돌이 푸ㆍ보노보노 

어릴 적 익숙했던 캐릭터들이 

삶에 지친 20~30대 여성들에 

따뜻한 감성과 위로를 선물 

각 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토닥토닥 "잘 될 거야"... 출판계

요즘 20~30대 여성들의 멘토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 강사가 아니라, 어릴 적 친숙했던 캐릭터들이다. 교보문고 제공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남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어릴 적 추억을 함께한 캐릭터의 사소한 한마디, 어릴 적 그때는 멋모르고 무심코 흘려들었던 그 한마디를 곱씹으면서 더 많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보노보노’는 저한테만 그런 의미의 멘토인 줄 알았는데, 책 내고 나서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걸 알게 됐어요.”

 

9일 출판사 다산북스 윤세미 팀장의 말이다. 윤 팀장은 지난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놀)를 내놨다. 사회생활의 무게감이 점점 커져갈 때쯤 어릴 적 읽었던 만화책 ‘보노보노’를 떠올렸다. 아이들용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봤으나, 그건 너무 아이들용 유머에 치우쳐 있었다. 김신회 작가와 어릴 적 즐겨 봤던 ‘진짜’ 보노보노에 대한 얘기를 하다 김 작가의 삶과 보노보노의 만화 에피소드를 연결 짓는 책을 기획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에 대한 반응은 예상 외로 열광적이었다. 1년 만에 10만부 이상 판매됐다.

 

지난달엔 아예 보노보노 작가 이가리시 미키오가 직접 쓴 ‘보노보노의 인생상담’도 내놨다. 독자들의 사연을 받아 보노보노 캐릭터들이 수다인지 상담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책인데, 이 책도 인기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3만부 정도 판매됐다. 윤 팀장은 “일본에서는 보노보노가 너무 익숙한 캐릭터라 책에 대한 반응이 크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독자들 반응이 더 뜨겁다”고 말했다. 내년쯤 보노보노와 관련된 책을 한 권 정도 더 낼 생각이다.

 

출판계에 ‘캐릭터’가 뜨고 있다. 보노보노의 경쟁자이자 다음 유행할 만한 캐릭터도 이미 등장했다. 지난주 발표된 교보문고, 영풍문고, 예스24 등 각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따르면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알에이치코리아)가 10위권 안에 진입했다.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의 입을 빌려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 만족하고 느끼는 데서 나온다는 얘기들을 들려준다. 지난달 말 출간됐는데 판매량은 벌써 11만부를 넘겼다.

 

캐릭터 바람의 원조는 2016년 7월 첫 선을 보인 백영옥 작가의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아르테)이다. 캐나다 소설 ‘빨강 머리 앤’의 주인공의 말을 빌려 독자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빨강 머리’는 각종 문학 작품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고집 세고 독립적인 북유럽 스타일의 여성을 드러내는 장치다. 스웨덴 동화 ‘말괄량이 삐삐’의 삐삐,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변호사 미란다처럼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캐릭터다. 사회생활에 지친 20~30대 여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엔 딱 맞아떨어지는 캐릭터였던 셈이다.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은 30만부 넘게 판매됐다.

토닥토닥 "잘 될 거야"... 출판계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매일 있어'의 한 장면. 심오한 가르침, 훈계 같은 것 없이 읽는 이를 다독여준다. 알에이치코리아 제공

캐릭터 책 열풍에는 여러 요인이 꼽힌다. 무엇보다 캐릭터 자체의 힘이다. 만화, 팬시 상품 등으로 어릴 적 많이 접해서 익숙한 캐릭터들은 거부감을 줄여 준다. 다만 따뜻하고 포용적인 이미지여야 한다. 좋고 싫음이 엇갈리거나 지나치게 널리 알려진 대중적 캐릭터의 경우 확장성에 문제가 있다. ‘곰돌이 푸…’ 를 기획한 알에이치코리아 최경민 대리는 “그런 이유 때문에 디즈니 캐릭터를 찾다 가장 유명한 미키마우스 대신 포근한 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나름 꼽을 만한 ‘명대사’도 있어야 한다. 앤과 푸는 그럴 듯 하지만, 보노보노는 조금 의외다. 보노보노 캐릭터들의 대사는 때론 장난스럽고, 때론 허무개그에 가깝기도 하다. 윤세미 팀장은 “독자들은 오히려 그런 점에서 맑고 맑은 동심의 판단을 읽어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너무 묵직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대표적인 예가 북유럽의 정서가 담긴 ‘무민’, 스누피로 유명한 ‘피너츠’ 같은 것이 꼽힌다. 출판계 관계자는 “해외 시장에서 충분히 검증된, 그래서 캐릭터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아이템이란 기대가 많았지만 지나치게 사색적인 내용 때문에 마니아 이외 시장으로 확대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애초 기대에는 못 미쳤다는 평”이라고 말했다.

토닥토닥 "잘 될 거야"... 출판계

보노보노(왼쪽부터)와 너부리, 뽀로리가 하늘을 바라다보며 얘기하고 있다.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이 묘한 깨달음을 준다. ⓒ ‘BONOBONO’ MIKIO IGARASHI / TAKE SHOBO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영향도 크다. 친숙한 이미지의 캐릭터들을 화사하게 포장한 책들은 보기에 좋다. SNS에 능숙한 20~30대 여성 독자들의 취향에 맞다.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책들이 선물용으로도 각광받는 이유다. 여름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표지만 새롭게 바꾼 ‘리커버’ 형태가 수시로 출간된다. 이런 책들의 구매층 80%가 20~30대 여성들이다.

 

캐릭터 책의 유행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앤과 보노보노, 푸를 넘어 다음 캐릭터를 모색하고 있다는 소문도 출판계에 무성하고 기대평도 넘친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감성과 위로, 에세이라는 출판계의 3가지 키워드가 한동안 강연이나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캐릭터들이 바통을 이어받는 모양새”라면서 “책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캐릭터 책은 명확한 캐릭터와 좋은 문장이 있으면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유형이어서 정교한 기획력만 뒷받침된다면 상당 기간 이런 흐름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