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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by한국일보

한글 깨친 칠곡 할매들 시집 출간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지음 ‘시가 뭐고’ 전문) 웃음이 빵 터지는 이 사랑스러운 시는 경북 칠곡군의 까막눈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서 쓴 시 89편을 엮은 시집 ‘시가 뭐고?’(강금연 외 88명 지음ㆍ삶창 발행)에 실린 작품이다.

 

칠곡군의 한글교실에서 배우고 있는 할머니 250여명이 쓴 시에서 추렸다. 한 편 한 편이 꾸밈없이 소박하면 삶의 숨결이 고스란히 밴 진국이다. 살아온 날과 늙어감에 대해, 자식들과 영감님 생각하며, 농사일의 고됨과 보람에 대해, 배우는 즐거움에 대해 썼다. 맞춤법 틀린 것과 사투리를 손대지 않고 할매들이 쓴 원문 그대로 실어서 더 푸근하게 다가온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칠곡군 소화자 할매가 난생 처음 쓴 시의 육필 원고. 인쇄본 시집에는 실리지 않은 이 육필 원고들은 팬시노트로 선보일 예정이다. 칠곡군 제공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눈이 침침해서/ 칠판에 글이 안 보였다/ 눈물이 났다/ 안과에 가서 수술했더니/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칠판에 글이 잘 보인다/ 글이 잘 보여 눈물이 났다/ 심봉사도 나만큼 좋아했나”(박후불 지음 ‘눈’ 전문)

 

심봉사를 불러낸 타이밍이 압권이다. 독자도 덩달아 좋아라고 눈이 환해진다.

 

이 책을 기획한 (사)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은 기획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내가 마을에서 만난 할매들은 “경로당 화투 치냐”며 면박을 주는 타짜이고, TV 드라마를 끊임없이 삶의 경험들과 직조하는 스토리텔러이고, “먼저 간 영감이 못 알아볼까 봐 들고 갈라고” 혼서지를 보관한다는 로맨티스트이며, “찬바람 고들고들 할 때 볕에 날라리날라리” 무말랭이를 말린다는 이야기꾼이었다. 할매들의 뼈에 새겨진 이야기 속에는 몸에 마음에 깃든 무늬, 삶의 주름, 수많은 이들(사람, 짐승, 식물 등)의 거처가 생생하고, 이웃이, 마을이, 지역이 한몸에 들어 앉아 살고 있었다.”

 

할매 시인들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참새 한 마리에도 따뜻한 눈길을 준다. (점심 먹고 노인정 가는 길에) “보리밭에 참새들이/ 보리를 따먹다가/ 나한테 들켜/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니/ 저 참새가 조그만 배나 채워갔는지!/ 내 양심에 미안하구나”(김무임 지음 ‘참새’) “마늘을 캐가지고 아들 딸 다 농가 먹었다/ 논에는 깨를 심었는데/ 검은깨 농사지어서/ 또 다 농가 먹어야지/ 깨가 아주 잘 났다”(박차남 지음 ‘농가 먹어야지’ 전문)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경북 칠곡군 한글교실에서 할머니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칠곡군 제공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홍복남 할머니의 시 육필 원고. 칠곡군 제공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박금분 할머니의 시 육필 원고. 칠곡군 제공

이 시집은 경북 칠곡군의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로 나왔다. 칠곡군은 10여년 전 평생교육도시를 선언한 뒤 쌓은 경험을 토대로 2012년부터 마을인문학 사업을 하고 있다. 전문가 강연이나 독서 위주인 여느 인문학 프로그램과 달리, 칠곡의 마을인문학은 철저히 마을에 뿌리를 박고 주민 스스로 꾸려가는 게 특징이다. 영오1리의 전통축제인 ‘천왕제’, 어로리 한글교실 할머니들의 ‘보람할매연극단’, 매일 아침 마을 방송으로 할매들이 시를 낭송하는 숭오2리의 특산물 ‘시를 먹고 자란 단감’, 빨래터가 남아 있는 송오1리의 ‘빨래터합창단’ 등이 전부 칠곡의 마을인문학에서 나왔다. 평균 연령 75세의 보람할매연극단은 꽤 알려져서 12월 제주도 초청공연을 앞두고 있다. 마을인문학 사업 담당자인 칠곡군 공무원 지선영(46)씨는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삶을 산 할머니들에게 나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준 것이 칠곡 인문학의 가장 좋은 성과”라고 말한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윤분이 할머니의 시 손글씨 원고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장병학 할머니의 작품. 칠곡군 제공

현재 칠곡군의 인문학마을은 모두 19곳. 12곳은 전통적인 농촌이고 7곳은 아파트촌인데, 10월이면 저마다 특색있는 프로그램으로 일제히 인문학축제를 벌인다. 기획도 진행도 전부 주민이 하고 외부 전문가는 돕기만 한다.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도 모두 주민이다. 젓가락 장단 선생님, 빨래터노래 선생님, 재봉틀 선생님 식으로 군내 인문학마을에 전부 56명의 마을선생님이 있는데, 많지는 않지만 회당 3만~4만원씩 강사료를 받고 활동한다. 마을마다 마을 리더 1명, 마을기자 1명을 두고 마을인문학을 이끌고 기록한다. “인문학, 그기 뭐꼬?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인문학이지”라는 한 할매의 말에 칠곡 인문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