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 아래 ‘달콤한 슬픔’ 같은...문학 고을 장흥

[여행]by 한국일보

낮도깨비에 홀린 듯...폭염주의보에 4시간 산행기


이청준ㆍ한승원ㆍ송기숙… 쟁쟁한 글쟁이들 배출

천관문학관ㆍ해산토굴 등 곳곳에 감춰진 이야기

천관산 아래 ‘달콤한 슬픔’ 같은..

천관산 주 능선 환희대에서 내려다본 모습. 갈수록 새로운 경치에 이끌려 종주까지 하게 됐지만, 여름 산행은 함부로 권하고 싶지 않다. 천관산은 10월 억새가 덮일 때 가장 아름답다. 장흥=최흥수기자

맛만 보자는 마음으로 내디딘 발걸음이 결국 4시간짜리 ‘풀 코스’ 산행이 되어 버렸다.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염천에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서울의 정남쪽 장흥,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우뚝 솟은 천관산을 오른 연유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놈의 날씨 때문이었다.

낮도깨비에 홀린 듯, 천관산 폭염 산행기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천관산(天冠山, 723m)은 ‘호남 5대 명산’으로 불린다. ‘천관’은 다양한 모양으로 솟은 기암괴석이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정상에서 뻗은 산줄기마다 하얗게 솟은 바위 봉우리들은 북측 관산읍이나 남측 대덕읍 어디에서 봐도 웅장하고 기품이 넘친다.


아래서 올려다보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데, 쉬엄쉬엄 30분만 오르면 남해안 다도해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수평선 너머로 한라산도 볼 수 있다는 꼬임에 그만 귀가 솔깃해지고 말았다. 산 중턱 천관산문학공원까지 도로가 나 있어서 시작은 어렵지 않다. 애초 목표는 구룡봉 아래 탑산사였다. 아침 나절이고 산사까지 가는 길은 숲 그늘이라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다소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걸을 만했다.

천관산 아래 ‘달콤한 슬픔’ 같은..

구룡봉 아래 탑산사에서 본 대덕읍내 들판과 남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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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과 골짜기 곳곳에 기암괴석이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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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사 옆 바위 군상. 누가 봐도 거북바위다.

예정대로 30여분 만에 탑산사 앞마당에 이르니, 과연 정면 대덕읍의 너른 들녘 뒤편으로 옹기종기 붙었다 이어지는 다도해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산사 주변과 능선엔 아래서 볼 수 없었던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또 다른 구경거리다. 모양에 따라 사자바위 거북바위 용바위 종(鐘)바위는 기본이고, 사찰 뒤편에는 구슬을 꿴 듯한 5층 거석이 아슬아슬하게 경사면에 얹혀 있다. 불교에 귀의해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세운 인도 아소카 왕의 이름을 따 ‘아육왕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풍광이야 나무랄 데 없는데 날씨가 다소 아쉬웠다. 조금만 기다리면 연무가 벗겨지고 좀 더 쾌청해질 것 같았다. 이대로 내려가야 하나 망설이는 중인데, 천관산을 수도 없이 올랐다는 장흥군청 공무원 엄길섭씨가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왔다. 200m만 더 올라가면 구룡봉이고, 그곳부터는 능선이어서 아주 쉽다고 유혹한다. 날은 점점 뜨거워지고 문제는 시간과 체력인데, 여기서 그냥 내려가나 능선으로 돌아가나 큰 차이가 없단다. 더구나 풍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라니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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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회진면과 대덕읍은 소설가 이청준을 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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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봉 아래 ‘아육왕탑’은 일부러 쌓은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구룡봉까지는 목재 계단이 놓여 있었지만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힘들었다. 용이 지나간 자리일까. 정상 부근 제법 판판한 바위에는 공룡발자국처럼 파인 자국이 여럿이고, 바로 옆은 가파른 낭떠러지다. 그 아래로 다도해 풍경은 더 넓고 선명해졌다. 멀리 고흥과 완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고깃배처럼 떠 있고, 바다로 향하는 육지가 옷깃처럼 하늘거린다. 돛단배인 듯 낙타인 듯 뒤편 진죽봉 바위 능선도 장관이다. 이곳부터 정상인 연대봉까지는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길이다. 길 양편은 10월이면 은빛 억새 평원으로 변신한다. 사실 천관산 등산을 하기에도 이때가 최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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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봉에서는 왼편 고흥에서 오른편 완도에 이르는 다도해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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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능선에는 돛단배를 닮은 진죽봉이 웅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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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 양편은 10월이면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 군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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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정상부 능선의 환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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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대에서 내려가는 산줄기에도 기암괴석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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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능선에서 남쪽으로 본 풍경.

내리쬐는 땡볕에 늘어진 걸음으로 또 다른 바위 봉우리인 환희대에 다다르자 산아래 마을 스피커에서 울리는 폭염주의보 안내방송이 골짜기에 퍼진다. 능선에는 바람이 살살 불어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도, 땀은 비 오 듯하고 몸은 바람 빠진 튜브처럼 흐느적거린다. 발 아래 풍경은 탄성을 자아내는데, 입에서는 뒤늦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어쩌자고 이 더위에 겁도 없이 무모한 산행을 감행했을까. 햇살은 따갑고, 능선 양편으로 펼쳐지는 바다와 들과 마을 풍경은 얄미울 정도로 산뜻하고 정겹고 푸근하다. 낮도깨비에 홀린 듯, 자리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풍경에 반사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느라 3시간이면 충분하다던 산행은 결국 4시간을 다 채우고 마무리됐다. 동행했던 J와 L은 결국 더위 먹은 것으로 충분하다며 점심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가을 억새 산행을 미리 다녀왔다고 위안할밖에. 사실 폭염만 아니면 천관산 등산 코스는 어느 곳보다 경제적이다. 산의 규모에 비해 풍경이 넓고, 들이는 힘에 비해 요모조모 볼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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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전망대에서는 고흥반도의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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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각 층마다 소소한 볼거리를 넣었다. 장흥 출신 작자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상영한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절정일 때는 대안으로 ‘정남진전망대’를 추천한다. 천관산에서 멀지 않고 타워 전망대가 그렇듯 기본은 갖췄다. 46m 타워 꼭대기에 오르면 득량만 일대와 고흥 소록도, 거금대교, 완도, 금일도 등 다도해의 섬들이 옹기종기 한눈에 들어온다. 뒤편에 우뚝 선 천관산의 모습도 웅장하다.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하면 더욱 알차다. 9층 카페를 시작으로 각 층마다 북카페(8층), 문학영화관(7층), 추억여행관(6층), 축제관(5층), 이야기관(4층), 푸드홍보관(3층), 트릭아트포토존(2층) 등으로 꾸며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고향은 ‘달콤한 슬픔 같은 것’ 문학고을 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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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문학관 내부에 장흥을 대표하는 이청준과 한승원의 대형 초상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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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외부에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천관산에 간 애초 목적은 ‘천관문학관’이었다. 인구 5만에도 못 미치는 작은 고을이지만 장흥은 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문인을 여럿 배출한 문학의 고장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 동년배인 한승원이다. 천관산 남측 기슭의 천관문학관은 이 두 사람을 비롯해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송기숙, 시조시인 김제현, 아동문학가 김녹촌, 소설가 이승우 등 장흥 출신 문인과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백광홍(1522~1556)에서부터 소설가 한강까지 이어지는 장흥 문학의 저력을 자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학관 입구에는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2년이 지난 지금도 빛바랜 채 걸려 있다. 한강의 고향은 아니지만, 장흥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장흥 출신 한승원의 딸’이다.


문학관 뒤편 천관산문학공원은 국내에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공원이다. 천관산을 남도의 명승지로 가꾸자고 나선 대덕읍민들이 매년 수 천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고, 3km 등산로에 400여개의 돌탑을 쌓아 조성했다. 문학 고을의 맥을 잇자는 뜻으로 54명의 국내 문인의 육필 메시지를 담은 타임캡슐과 함께 15m 높이의 문탑(文塔)도 건립했다. 또 그 문인들의 메시지와 작품은 천관산 자연석을 활용한 문학비(文學碑)에 새겨 공원으로 꾸몄다. 문학 고을 장흥을 알리려는 아이디어와 주민들의 노력에 비해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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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문학공원으로 가는 길에 대덕읍민들이 쌓은 다양한 석탑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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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문인들의 육필 메시지 타임캡슐을 묻은 천관산문학공원 문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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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읍 각 동창회와 단체에서 문학공원을 조성하면서 새긴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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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원의 이청준 문학비. 첫머리 ‘큰산’은 지역주민들이 천관산을 이르는 말이다.

이청준의 문학비에는 그의 작품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의 한 대목을 새겼다. 그는 천관산에 대해 ‘큰산 꼭대기 구룡봉에서 바라 본 세상은 끝없이 넓었다. 작은 동산 같은 그의 마을 뒷산 너머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아득히 하늘로 이어져가고, 북으로는 수많은 산들이 부연 연무 속으로 겹겹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관내 모든 학교의 교가 속에 이 장엄한 산이 우뚝 솟아 있듯이, 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산이 들어와 우뚝 솟아 있다’라고 새긴 한승원의 문학비도 천관산과 관련이 있다. 두 사람의 고향은 바로 천관산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회진면(당시는 대덕면)이다.


이청준에게 고향은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달콤한 슬픔, 달콤한 피곤기 같은 것’이었다. 그의 자전적 단편소설 ‘눈길’에서 묘사한 복잡한 감정이다. K시(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고향집에서 평소처럼 저녁 식사를 차리고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다. 다음날 새벽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십오리 산길을 넘어 대덕읍 차부(버스터미널)에서 아들을 태워 보낼 때까지 모자는 끝내 그 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애틋한 어머니가 남의 집 단칸방을 전전하던 고향은 그에게 영원한 애증이었던 듯하다. 생전에는 고향에 자주 왕래하지 않았지만 죽어서 그는 결국 고향 진목리 인근 갯나들마을에 묻혔다. 어머니가 밭일을 하던 곳이었다. 묘지 바닥에 장흥의 문학지도를 새겨 ‘이청준 문학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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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생가에 영화 ‘천년학’과 관련된 인물들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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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리 제방에 남아 있는 영화 ‘천년학’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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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세트에서 본 선학동 마을. 뒷산 능선이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이청준의 고향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회진리 제방에는 그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천년학’ 세트가 남아 있다. 2007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이 생활했던 허름한 건물은 보잘것없지만, 그 집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고고하게 날개를 펼치는 학의 품에 아늑하게 안긴 모습이다. 마을 뒤편 관음봉 능선은 가운데가 봉긋하고 양쪽은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마을 앞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수면에 비친 그 모습이 영락없이 날아가는 학을 닮았다. 간척사업으로 포구는 논이 돼 버렸지만,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영화를 개봉한 후 회진리는 ‘선학동’으로 더 알려졌다.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산책길을 내고, 봄에는 유채밭, 가을에는 메밀밭을 가꿔 관광객을 맞는다. 매년 10월에는 주민들 주도로 메밀꽃 축제를 연다. 선선한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메밀꽃과 탁 트인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이 또 한 폭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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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면 한승원의 거처인 해산토굴. 이따금씩 새우젓 저장고로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천관산 아래 ‘달콤한 슬픔’ 같은..

해돋이해변의 한승원문학산책길. 해산토굴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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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커플이 인적이 드문 여다지해변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한승원의 고향도 회진면이지만, ‘한승원 문학산책길’은 안양면(장흥에서 부산, 안양, 용산은 면 단위이고 대덕은 읍이다) 여다지해변에 조성했다. 1997년 귀향해 터를 잡은 ‘해산토굴’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다. 해산토굴을 더러 새우젓 저장창고로 오인하고 찾아오는 관광객도 있는데, 한승원의 호인 해산(海山)과 불가에서 거처를 낮춰 부르는 토굴(土窟)을 합친 말이다. 문학산책길에는 그가 지은 20여편의 시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약 700m에 이르는 해변은 특별히 모래가 고운 것도 아니고, 넓지도 않다. 산책길에 조그만 정자 하나 외에 이렇다 할 편의시설이나 즐길거리가 없어 관광지랄 것도 없다. 그저 득량만의 잔잔한 바다와 섬들이 편안함을 주는, 한적하고 수수한 해변이다. 분위기 좀 아는 사람들이 찾을 만한 곳이다.


장흥=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18.07.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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