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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싶다면 불을 더해라

by한국일보

홍옥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초가을부터 찬바람이 불기 직전까지 짧은 기간에 수확이 가능한 홍옥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20세기 초 한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29일 오후 8시 44분. 토요일이었다. 저녁을 대강 차려 먹고 소파에 누워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데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하나 날아들어 왔다. ‘00농원 홍옥 사과(후불제 판매 중) 토종 홍옥 40과 5만원, 50과 4만원, 60과 3만5,000원’. 농장이름이 낯익었다. 한 5년쯤 이맘때면 인터넷 오픈 마켓에서 사먹어 온 홍옥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매년 인터넷에서 샀는데 올해는 직접 판매하시는 건가요?’ ‘네, 10년 넘게 오픈마켓과 거래했는데 판매 수수료 10%, 등록비 등 공제금이 20% 가까이 돼 농사지어 감당이 안 돼 차라리 1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드리고자 합니다.’원래 사먹던 농장이었고 마침 홍옥을 기다려왔던 참이었으므로 반가운 마음으로 배송정보를 문자로 보내고 물었다. ‘후불 괜찮으시겠어요?’ 사람들이 그야말로 ‘먹고 튀면’ 대체 어떻게 대처하려는 건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자 답이 날아왔다. ‘네 나이 많은 늙ㄹ은 농사 꾼입니다.’(맞춤법에 맞지 않은 문자 그대로 옮김) 서글픔도 무엇도 정확히 아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예고대로 그 다음 주 화요일,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크고 매끈매끈한 홍옥 열아홉 개가 담긴 상자가 도착했다. 받고 바로 확인 문자를 보냈다. ‘송금했습니다. 확인하시고 문제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드리고 다 먹고 또 주문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실시간 자동 통보됩니다. 진심으로 어려운 놓촌을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까다로운 보관에 천대받는 홍옥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홍옥은 상큼한 신맛이 단맛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아삭한 속살의 사과다. 아삭한 질감을 보존하려면 따뜻한 물에 씻어 물기를 제거한 뒤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하는 게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렇게 빨갛고 잘생긴 사과 한 상자를 받아 들고 서글픔도 무엇도 정확히 아닌 감정에 이끌려 원래 준비하고 있던 원고를 잠시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홍옥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냥 사과가 아니라 홍옥이다. 그리고 홍옥이라고 강조, 구분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아니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 지면에서 굳이 다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대받는 식재료를 다루는 것이 이 지면의 기본 목표인데 그렇다면 홍옥만큼 천대받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홍옥으로 불리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상큼한 신맛이 단맛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아삭한 속살의 사과. 이렇게만 불러도 충분하다. 그만큼 이런 맛과 질감의 사과가 드물기, 아니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사과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과일 혹은 더 나아가 채소까지 포함한 지평이 보인다. 일단 맛보다 재배 및 유통에 잘 버티는 품종이 사랑받는다. 토마토 편(본보 9월 15일 자)에서도 다루었으니 딱히 새로운 일도 아니며 거의 모든 과채에 적용되는 사항이다. 20세기 초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사과 품종이라 알려진 홍옥은 사실 일본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미국이 고향인 홍옥은 1796년과 1826년에 오하이오주와 뉴욕주에서 각각 최초로 경작을 시도했다는 설이 딸려 온다. 두 군데가 원조를 자처하는 셈인데, 어쨌거나 ’조너선’이라는 사람에게서 딴 품종명을 썼다는 공통점은 있다. 이 조너선이 19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홍옥이 돼 한국에 도입됐다.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는 역사가 말해주듯 홍옥은 대부분의 병충해에 약하며 낙과의 비율도 높다. 게다가 저장성도 요즘의 품종에 비하면 떨어지는데다가 초가을부터 찬바람이 불기 직전까지 잠깐만 수확이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명맥이 끊길 지경으로 밀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데, 문제는 새로운 품종이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라는 사실이다. ‘꿀 사과’라고 일컫는 것들 말이다. 얇은 껍질 밑으로 촘촘하지 않은, 어찌 보면 스폰지와도 비슷한 과육이 즙보다 물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다. 신맛은 썩 두드러지지 않고 뭉근한 단맛이 넘쳐 금방 물린다. 이런 맛에 과육마저 단단하지 않으니 제과제빵을 통해 익혀 먹기도 쉽지 않다. 가열하면 푸석푸석하게 잘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싸지만 맛있다고 소문이 난 피코크의 사과 타르트(프랑스)나 그럭저럭 먹을 만한 이케아의 사과 케이크(독일)가 모두 국산이 아니라는 점이 한국 사과의 현주소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뜨거운 수돗물에 씻어 비닐봉지에 쏙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홍옥은 고온에 익혀 먹어야 진가를 발휘한다. 버터를 풍성하게 넣은 밀가루 반죽 위에 길이대로 얇게 썬 사과를 올리고 뚜껑을 덮지 않고 굽는 갈레트(프랑스식 사과 파이)에 홍옥을 사용하면 맛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현실 속에서 반짝 스치고 지나가는 홍옥의 철을 어떻게 잘 즐길 수 있을까. 소매점에서 낱개로 잘 팔지도 않고, 인터넷에서도 소수의 판매처로부터 상자 단위로 구매해야 하니 일단 장기 보관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재배와 보관의 불편함이 단점인 품종이니만큼 집에서도 조금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 봐야 잘 씻어 냉장 보관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일단 부패를 부추기는 과일 혹은 채소의 표면 위 미생물을 씻어내는 게 좋은데,요즘은 데치기에 가깝도록 뜨거운 물에 담가 씻기가 소개되고 있다. 말 그대로 40~60도의 물에 담가 표면의 미생물을 씻어내는 한편 후숙을 늦추는 원리이다. 온도계를 쓰면 정확하고 좋겠지만 가정에서라면 가장 뜨거운 수돗물로 충분히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말끔히 비운 싱크대, 혹은 집에서 쓰는 가장 크고 깊은 냄비나 솥에 수돗물을 최대한 뜨겁게 틀어 담아 홍옥을 담근다. 이때 물에 과채류용 세제를 섞어도 좋다. 몇 분 정도 담가 두었다가 건져 물기를 말끔하게 닦아내거나 말린 뒤 냉장고의 과채칸 서랍에 담아둔다. 조금 더 공을 들이고 싶다면 각각을 축축한 종이 행주 등으로 싸서 밀폐봉지 등에 담은 뒤 보관해도 좋다. 다만 사과는 과일의 후숙을 촉진하는 에틸렌가스를 맹렬하게 분출하므로, 담는 봉지에 구멍을 뚫어준다.


이처럼 한꺼번에 씻어 냉장 보관하면 내킬 때 편하게 꺼내 바로 먹을 수 있다. 다른 요즘 품종들에 비해 홍옥은 껍질이 다소 두껍고 질긴 게 흠이지만 그 밑으로 숨어 있는 아삭한 속살이 앞니로 베어 무는 수고 정도는 보답해 준다. 단맛과 짝을 이루는 충분하고도 상큼한 신맛 덕분에 ‘매일 사과 한 개씩 먹으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옛말이 유래된 품종이 바로 홍옥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신맛 덕분에 잘 물리지 않으니 사실 하루 한 알 이상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생식이라는 과일의 기본을 갖춘 홍옥은 익혀 먹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대체로 파이 혹은 갈레트 같은 서양식 제과제빵의 주재료이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삼겹살을 필두로 한국에서 가장 잘 먹는 돼지고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과일이 파인애플과 더불어 사과이기 때문이다. 두드러지는 신맛이 느끼함을 덜어주는 원리로 구운 고기에 곁들여 많이 먹는다.

신맛 강한 홍옥의 조리법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신맛이 강한 홍옥은 깍둑 썰어 볶은 뒤 오트밀이나 요거트 등과 함께 먹으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여러 갈래로 조리할 수 있지만 보통의 조리 도구만 갖춘 가정에서라면 깍둑 썰어 볶는 게 가장 편하다. 논스틱 코팅(음식이 눌어붙지 않는 코팅)이 된 팬을 중불에 올리고 버터를 한 덩이 넉넉히 올린 뒤 녹아 거품을 내기 시작하면 깍둑 썬 사과를 올려 과육이 불투명해질 때까지 뒤적이며 볶는다. 입맛에 따라 소금 혹은 설탕으로 간한 뒤 불에서 내린다. 따뜻할 때 고기에 곁들여도 좋지만 잼의 중간 상태이므로 차갑게 식혀 먹어도 좋다. 비단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요즘 아침식사의 대안으로 부지런히 소개되고 있는 오트밀이나 무당 요거트에 한 숟갈 듬뿍 올려 먹어도 아주 잘 어울린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으니 따뜻한 느낌의 향신료인 계피가루를 조금 더해 볶으면 짜고 단 음식에 두루 잘 어울리는 요리가 된다.


볶음에서 한 단계 정도 요리 욕심을 부리고 싶다면 앞서 언급한 파이와 갈레트의 중간 형태 음식인 크럼블(crumble)에 도전해 볼 수 있다. 사과 위에 버터와 밀가루, 설탕으로 만든 스트로이젤(streusel), 즉 한국에서 ‘소보로’로 통하는 자잘하고 바삭한 덩이를 올려 구운 음식이다. 마침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먹고 마시는 법에 대한 음식 철학을 다룬 책 ‘철학이 있는 식탁’에서 생각할 거리와 더불어 아주 간단한 레시피를 다루고 있다. 제철 식재료의 미덕을 설파하는 예로 든 요리인지라 가을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홍옥으로 만들면 더더욱 의미가 살아난다.


바지니의 말을 빌리자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만들기 쉬운’데, 먼저 사과의 껍질을 벗기고 자잘하게 썬다. 이를 오븐 사용 가능한, 조금 우묵한 접시에 담고 크럼블 고명을 올린다. 밀가루와 버터, 설탕과 소금 약간을 섞어 손으로 가볍게 버무린다. 손가락 사이에서 부슬부슬하지만 조금 집어 눌렀을 때 뭉칠 정도면 밀가루와 버터의 비율이 맞는 것이다. 크럼블에 견과류나 귀리를 더하면 질감도 맛도 좀 다양해진다. 과일 위에 크럼블 고명을 얹고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어 윗면이 노릇해질 때까지 45~60분가량 굽는다. 앞서 소개한 사과 볶음처럼 따뜻하게 먹어도 좋지만, 차게 먹는 게 좀 더 맛있다. 특히 여느 제품보다 뻑뻑한 그릭 요거트와 아주 잘 어울린다.

홍옥, 편하게 손질해 맛있게 먹으려면

스치듯 지나가는 빨간 사과를 붙잡고

홍옥을 한번에 간편하게 자를 수 있는 사과 스프리타. 게티이미지뱅크

과도를 섬세하게 사용해 한 줄로 길게 사과 껍질을 벗기는 건 일종의 예술이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 살짝 뻣뻣하지만 홍옥은 껍질째 먹는 게 맛있는데, 굳이 벗기고 싶다면 채소껍질 벗기는 칼(필러)이 훨씬 더 편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고르게 벗길 수 있다. 차례상에 올릴 때처럼 사과를 도마에 옆으로 뉘어 위와 아래를 평평하게 잘라낸 뒤 도마에 세우거나 손에 쥐고 위에서 아래로 한 줄씩 껍질을 벗긴다. 한편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홍옥을 익혀 먹는다면 씨 제거기(코어러)를 쓰는 게 훨씬 편하다. 단순히 씨만 제거해 주는 제품도 있지만 그보다 톱니바퀴처럼 칼날이 달려 꼭지와 씨방을 분리하는 동시에 과육의 나머지 부분을 고르게 썰어 주는 게 좋다. 고른 조리의 제일 조건이 식재료의 등분이며 칼을 쓸 때보다 훨씬 빨리 썰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비록 자주 쓰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개쯤 갖춰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케아 제품 ‘스프리타’가 앞서 설명한 기능을 모두 갖추고도 단돈 1,900원이다.


사과는 치즈와 함께 먹기 좋은 과일인데, 홍옥처럼 신맛이 두드러지는 사과라면 네덜란드가 고향이며 쌉쌀함이 분명한 고다 치즈가 가장 잘 어울린다. 고다는 이제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치즈이지만 만일 없다면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체다를 선택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한편 사과를 익혀 만든 디저트에 술을 곁들이고 싶다면 와인으로는 독일의 리즐링(약간의 단맛)이나 프랑스의 소테른(강한 단맛)이 잘 어울린다. 물론 사이더(혹은 시드르)나 칼바도스처럼 사과로 만든 술이라면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용재 음식평론가